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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한국일보-삶과 문화] 우리 아버지 김동호/김대환(관현악 전공) 교수

  • 작성자 이민아
  • 작성일 10.10.28
  • 조회수 9140

아버지가 문화공보부의 기획관리실장이셨던 때이니 1980년대 중반이었다. 아침식사 중 아버지가 불쑥 배우 김혜자 씨를 아는지 물으셨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막내가 "<전원일기>의 최불암, 김혜자씨를 모르는 사람도 있냐"고 하자 아버지가 머쓱해하셨다. 이유인즉 전날 문화공보부에 상을 받으러 온 김혜자 씨와 단 둘이 있게 되었는데 그 분이 맞는지 몰라 망설이다 축하인사를 못했다는 것이다. 배우 입장에서는 뻣뻣한 고위공무원이라 오해하여 불쾌했을 것 같다며 걱정을 하셨다.

아버지는 뉴스와 테니스 경기 외에는 TV를 안 보셨다. 영화 볼 시간도 거의 없으셨다. 그런 분이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었으니 낙하산 인사라며 영화인들이 반대한 것은 당시에는 섭섭했지만 돌이켜보면 당연하다. 그 후 아버지는 얼굴 뵙기 힘들 정도로 바쁘게 일하셨다. 사회인이 되어 보니 오랜 공직생활에 차관까지 지내신 분이 그리 몸을 낮춰 일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란 생각도 든다. 빠짐없이 영화를 보시고 관련 서적을 읽으시더니 국민배우도 모르시던 아버지는 어느덧 거짓말처럼 뼛속까지 영화인이 되셨고, 금년 부산국제영화제(PIFF) 집행위원장 직에서 퇴임하셨다.

영화제를 처음 방문했다. 영화인들의 아버지 사랑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작 바이올리니스트 딸은 당신을 위해 연주한 적도 없는데 노영심 씨는 아버지를 위해 작곡을 했고 그 음악 위에 PIFF 관계자들의 정성이 담긴 아버지 사진 영상이 흘렀다.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라는 아버지의 책 속 임권택 감독님의 추천사는 진솔하고 따뜻하다.

가족이기에, 여러 신문을 장식한 여배우 줄리엣 비노시와 아버지의 막춤 기사보다는 오랜 시간 함께한 홍효숙 프로그래머가 터뜨린 눈물 이야기에 눈길이 갔고 고마웠다. 온화한 리더십이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동료들이 진심을 알아주는 좋은 사람들일 때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용관 공동집행위원장, 전양준 부집행위원장,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는 창단부터 지금까지 영화제를 위해 흘렸던 자신들의 땀과 공(功)을 모두 아버지께 양보하고는 맨 앞에서 박수 치시는 속도 없는 분들이다. 그런 분들과 함께 한 세월이었으니 아버지는 더없이 행복하셨을 게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지나치게 큰 송별회였다. 간혹 부산국제영화제가 외형만 커졌다는 비난기사를 볼 때면 마음이 쓰였는데 이 송별회도 한 줄 보태는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공항으로 오는 길, 택시기사님이 폐막을 아쉬워하며 영화제 기간에는 수많은 외지인들 덕에 일할 맛이 난다고 했다. 서울로 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영화제 방문인사가 많을 때는 아침식사만 세 번씩 하실 때도 있다는 아버지와 잠시 함께 있을 기회가 있었다. 공무원과 영화인에 이어 인생 3막에서 무슨 일을 할까 설레어 하는 일흔 넘은 아버지를 뵈니 나 자신이 부끄럽다.

안정된 공무원이셨을 때보다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그 이후의 삶에서 아버지는 더 빛났다. 나는 교수로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경험한 소중한 시간 동안 계약직이라는 현실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나를 성장시킨 감사한 세월이다. 마음 한 켠 묵직한 돌을 얹고 살아온 나는 아버지의 딸이라 하기에 참 못났다.

작가 파울로 쿠엘류는 얼마 전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당신의 꿈을 향한 여정에서 사막이나 오아시스와 마주칠 준비를 하라. 그리고 그 중 무엇을 만나든 당신의 여정을 멈추지 말라.' 일흔 셋의 아버지는 또 다른 꿈을 위해 다시 사막을 건널 준비가 되어 있다. 아버지의 딸답게 살아야겠다.

원문보기 :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010/h201010272118568192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