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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고개 숙인 영웅의 부활 / 김형준(정치대학원)교수

  • 작성자 박정석
  • 작성일 05.11.28
  • 조회수 28917

[한겨레 2005-11-27 18:27]

세계 최초로 난치병 환자의 체세포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치료용 배아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해서 세계 생명 과학계의 희망이자 영웅으로 부상했던 황우석 교수가 고개를 숙였다. 황 교수는 생명윤리 헬싱키 선언에서 규제하고 있는 연구원의 난자를 연구에 활용했다는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채찍과 돌팔매를 본인에게만 몰아달라면서 속죄의 눈물을 흘렸다. 더구나, 속죄를 위해 세계줄기세포허브 소장직을 포함한 모든 겸직을 사퇴하고 백의종군 하는 자세로 순수한 과학도의 길만 걷겠다고 밝혔다.

눈 덮인 들판에 처음 발자국을 남기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연구를 진행했던 황 교수가 예기치 않은 윤리 논쟁의 눈사태를 맞아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참으로 안타깝겠지만 제2, 제3의 ‘고개 숙인 영웅’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냉철하게 돌아봐야 할 것이다. 이번 사태는 과학과 윤리 간의 논쟁을 넘어 향후 한국 과학계가 어떤 자세로 연구에 임해야 하는지 많은 점을 시사해준다.

첫째, 국내 생명과학 연구자들의 윤리 의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생명과학 연구가 더욱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법적 기준이 없었던 때의 윤리적 문제이기 때문에 황 교수는 잘못이 없다는 그릇된 동정론이나 국익 차원에서 황 교수는 무조건 보호되어야 한다는 비뚤어진 국익론 모두 위험한 생각이다. 세계 기준을 제대로 준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줄기세포 세계 허브로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생명 과학 연구는 그 어떤 연구보다 투명하게 해야 하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는 생명 윤리학계의 지적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둘째, 성취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전통을 세워야 한다. 성숙한 연구 전통이 정립된 사회에서는 예외 없이 업적보다는 과정을 존중한다. 연구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연구 과정이 잘못되면 명예와 신뢰를 모두 잃게 된다. 황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그저 눈앞의 일과 성취 외에 성찰한 여유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연구자들은 비록 더디지만 투명한 행보가 훨씬 강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번 일을 계기로 어떤 난자를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셋째, 연구가 한 개인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는 정교한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관행을 수립해야 한다. 연구가 인물이나 우연이 아닌 표준화된 운영 절차에 의해 흔들림 없이 진행될 때 비로서 시스템이 작동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 운영의 기본 원칙이 던져주는 함의는 명백하다. 황 교수가 없더라도 생명과학 연구는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는 확고한 시스템을 구축하라는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황 교수의 명예가 퇴색됐을 뿐만 아니라 최첨단 생명과학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고, 세계적 생명과학 허브로 거듭나려는 정부의 노력도 손상을 입게 되었다. 황 교수의 기자회견 이후 난자 채취의 부작용과 위험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난자 기증 신청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700명을 돌파하고 있다. 더구나 황 교수의 난자매매 의혹을 보도한 방송사에 대한 항의 촛불시위 등 왜곡된 행동들이 여과 없이 노출되고 있다. 맹목적이고 충동적인 온정주의와 국익을 앞세운 여론 호도는 오히려 고개 숙인 영웅의 화려한 부활을 가로 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할 것은 한국 생명 과학계가 서두름 없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키며 묵묵히 뚜벅뚜벅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 나가는 강한 행보를 할 수 있도록 차분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김형준/국민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