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대 경영대학은 혁신을 주도하여 기업과 사회에 새로운 물결을 창출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특성화된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연구기관입니다.
Kookmin University’s College of Business Administration is an educational and research institution that cultivates creative and specialized global talents who lead innovation and generate new waves in business and society.

상아탑 속의 학문추구가 아닌, 기업과 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실무경험을 제공하는 5개의 학부와 8개의 전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Rather than ivory-tower scholarship, it is composed of five schools and eight majors that provide diverse practical experiences to meet the needs of businesses and society.

급변하는 경영환경의 트렌드를 예측하고 국내외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문인력 양성 기관입니다.
It is an institution dedicated to training professionals capable of forecasting rapidly changing business environment trends and proactively responding to both domestic and international contexts.

국민대학교 경영대학은 다양한 장학제도를 통해 “지식” 못지 않게 “경험”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Through various scholarship programs, the College of Business Administration conveys to students that “experience” is as important as “knowledge.”

자기만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인재가 되도록 저희 경영대학과 “경험의 놀이터”에서 가득 찬 미래를 꿈꾸어 보세요.
Dream of a future filled with our College of Business Administration and its “Playground of Experience,” where you become the talent who can share your own proud story.

국민대학교 경영대학은 “혁신을 주도하여 기업과 사회에 새로운 물결을 창출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특성화된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연구기관”을 지향합니다.
The College of Business Administration at Kookmin University aspires to be an educational and research institution that “leads innovation and cultivates creative and specialized global talents capable of creating new waves in business and society.”
※ 퀵메뉴 메뉴에 대한 사용자 설정을 위해 쿠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뉴 체크 후 저장을 한 경우 쿠키 저장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역경의 열매] 이동섭 <1> 6·25 직후 보릿고개 속에도 온기 느끼며 성장 / 대학원 법학부 박사과정 07

나는 1955년 11월 전남 고흥군 풍양면 한동리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17세 때 시집와 1년 뒤 나를 낳으셨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마치 여린 소녀가 아기를 키우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이렇게 일찍 결혼해 일찍 자녀를 갖는 분위기였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을 때 하늘에서 하얀 비단이 내려오는 태몽을 꾸셨다. 비단에는 태극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섭아, 너는 나중에 커서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여. 용기와 소망을 잃지 말거라.”
그때는 6·25전쟁이 끝나고 2년밖에 되지 않던 상황이라 보릿고개가 있었다. 세 끼 밥을 제대로 챙겨먹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보리밥이나 열무김치, 쌀죽, 밀가루죽 같은 것으로 끼니를 채웠다. 그것조차도 못 먹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공무원이셨고 어머니가 손수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나마 다른 가정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다른 친구들은 풀죽으로 한 끼를 때웠다. 당시 코흘리개 친구들은 등교는 고사하고 매일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하느라 산을 누볐다. 어린 아이들이지만 농사일에도 매달렸다. 땔감을 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려워도 인정과 온기가 있었다. 지금처럼 돈 몇 푼에 생사가 오가는 그런 살벌한 사회는 아니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월급날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월급날이 되면 오토바이에 생선을 싣고 오셨다. 아버지는 당시 농촌지도소장이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오토바이가 나왔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형 세단 정도의 관용차와 비슷했다.
아버지는 3년에 한 번씩 타지 발령이 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근무지였던 전남 신안, 화순, 광양 등에서 함께 생활하셨다. 나는 자연스레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유년 시절은 할머니와 함께했던 기억이 많다.
장남인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할머니는 긴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셨다. 대나무로 만든 참빗으로 한 올 한 올 정성껏 빗어 비녀를 꽂으셨다. 할머니는 내가 졸고 있을 때면 나를 품에 안고 가슴을 토닥거리며 노래를 불러주셨다.
아버지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당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33년 공무원 재직 동안 월급을 제대로 갖다 준 적이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이었다. 아버지 형제가 12명이나 되고 자식이 6명이나 되는데다 맏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시부모를 모시니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나 깨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식 걱정, 집안 걱정으로 사셨다. 6남매 공부시키고 장가·시집보내는 데 뼈골이 다 빠질 정도로 고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코끝이 찡해진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이처럼 온갖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어머니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약력=전남 고흥 출생.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정치학석사, 국민대 법학박사. 태권도 공인 9단. 안철수 의원 정무특보 역임. 현 순복음노원교회 장로, ㈔세계태권도선교협회 회장, 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국민의당 원내부대표.
원문보기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582829&code=23111513&cp=n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