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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노를 사랑한 비보이

  • 작성자 하수정
  • 작성일 12.04.16
  • 조회수 13948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는 일, 그리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모두 쉽지 않은 결정인 만큼 거쳐야할 문턱이 많다. 이번 '그 사람을 찾습니다'는 이 모든 관문을 통과한, 영화 속 빌리와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걷는 이를 만났다. 비보이였던 우만제 학우는 발레리노를 꿈꾸며 국민대학교 공연예술학부 12학번으로 재학 중이다.

 

Q. 비보이와 발레리노의 공통분모는 '춤'이다. 누가 봐도 춤에 흥미와 재능이 있을 것 같다. 춤을 시작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혹시 <힙합>이라는 만화를 알지 모르겠다. 춤을 췄던 사람들에겐 춤 입문서와도 같았던 만화였다. 평소에도 만화책을 좋아해 즐겨보긴 했는데, 춤을 소재로 한 만화책은 그게 처음이라 굉장히 색다르게 다가왔다. 시쳇말로 내게 신세계였다. 그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 만화책에 그려진 춤추는 모습들을 보며 '과연 나도 할 수 있을까?'와 '나도 해보고 싶다'를 느꼈다. 무엇보다 내 시선을 이끌었던 건 손 하나로 온 몸을 지탱한다는 것이었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그때 힙합에 반했다. 그렇게 춤 세계에 자연스럽게 입문했다. 나와 같이 만화 힙합을 실제 세계로 옮기고픈 사람들이 저절로 모이면서 크루를 결성했다. 거기서 비보잉 활동을 했다.

Q. 비보이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무엇인가?
대회에 나가고 상 탔던 것들도 값진 추억이지만 무엇보다 춤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었다. 같이 춤추던 형, 동생들과 대회에 나가기 위해 밤새며 땀 흘리며 준비했던 시간들, 다른 팀들과 경쟁하며 토너먼트에 점점 올라가며 느꼈던 희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Q. 비보이를 내려놓고 발레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궁극적으로 춤을 계속 추기 위한 선택이었다. 오랫동안 해왔던 비보이를 내려놓는 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불현듯 문득, 내가 좋아하는 춤을 계속 추기 위해선 비보이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현실을 만나게 됐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발레를 시작하게 된 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소 도전적인 내 모습도 발레를 시작한 계기 중 하나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비보잉과 발레는 양극단에 서있다. 비보이는 다소 거칠고 몸을 꺾거나 힘이 들어가며 굵직굵직 하다. 한마디로 파워풀하다. 발레와는 춤의 배경이 되는 음악의 성격도 매우 다르다. 발레의 경우 각선미를 살리기 위해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손끝하나, 날갯짓 하는 듯 한 팔짓 등 섬세한 움직임이 주를 이룬다. 이 두 춤이 완전히 달랐기에 내가 발레를 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Q. 아직 우리 사회에서도 발레가 여자가 주를 이루고 있는 분야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렇기에 주변에서 반대가 없지 않았을 것 같다. 더군다나 비보이를 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반대는 없었나?
부모님의 허락을 받는 일이 쉽진 않았다. 부모님께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처음엔 어머니께서 반대하셨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내가 발레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네가 많이 고민한 끝에 한 결정이기에 존중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러면서도 당신께서 도와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며 모든 것은 나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당부하셨다. 어머니는 처음엔 반대하셨지만 후에 오히려 더 많이 도와주셨다. 비보이를 함께 했던 형, 친구들도 내가 가는 길을 응원해주었다.

 

 

Q. 앞서도 얘기했지만 발레와 비보잉은 춤으로 봤을 땐 같은 영역이지만, 그 속성은 전혀 다르다. 둘 다 직접 겪었기에 그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본인이 느낀 둘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비보잉은 틀이 없다. 연습을 통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 수 있다. 말하자면 자율적인 영역이 넓다. 하지만 그만큼 자기 몸을 보존하기가 힘들어 다칠 우려가 크다.
발레는 무엇보다 '선'을 살려야 한다. 몸을 더 보여주어야 한다. 비교적 절제된 느낌이 강하지만, 그 속에 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다리를 지탱해서 돌고, 점프를 하더라도 꼿꼿하게 세워서 점프를 한다. 테크닉을 얼마만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지가 중요하다. 직선, 곡선으로 몸을 표현해야하기 때문이다. 테크닉은, 예를 들면 단순하게 생각하면 공중에서 돌면서 다리를 찢는다든지,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돈다든지 하는 것들이 해당된다. 한마디로 비보잉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발레는 자신만의 테크닉을 만든다.

Q. 운동선수들도 자세를 유지하기 하루에 꼭 몇 시간씩은 운동을 한다고 하더라. 하루에 연습을 얼마나 하나?
발레도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이 자세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매일 연습을 한다. 또 발레 기술 중 파드되라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추는 춤이 있는데, 이는 호흡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체력도 필요하다. 다만 슬림함을 유지해야함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근육관리에도 힘쓰고 있다.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보통 여서 일곱 시간을 한다. 주말엔 연습이 없지만 자세를 잡기 위해 연습을 한다.

Q. 발레를 하면서 언제 보람을 느끼나?
온몸을 써야하기 때문에 체력적이 많이 힘들기도 하지만, 세상엔 많은 이해관계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를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그 힘든 것 역시 즐기려 노력한다. 사실 춤을 좋아하기에 힘들더라도 결국엔 즐거움으로 승화된다. 힘든 건 감수하게 되고, 잊게 된다. 오히려 즐겁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보람은 매순간 느낀다. 이만큼 연습하면 이만큼 는다. 그 정도가 1cm라 할지라도 내겐 기쁨이 된다. 성과가 눈에 보인다는 게 내겐 자극제다. 그러나 그 보람을 위해 연습하진 않는다. 발레를 위해 연습을 한다.

Q. 발레에 많은 종류의 작품이 있다. 특별히 욕심나는 작품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성 군무의 영역이 다소 넓은 발레 <해적>에서 알리 역, 볼거리가 풍부한 발레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 역을 해보고 싶다. 두 작품 모두 고난도 테크닉을 요한다. 나는 테크닉이 부족하다. 테크닉이 뛰어나서 그 작품을 해보고 싶기 보단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꼭 그 역할로 무대에 서보고 싶다.

Q. 발레리노로서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멈추지 않는 발레리노가 되고 싶다. 내가 만약 최고가 된다면, 그 순간에도 나는 내 스스로에게 "난 아직 멀었다"라는 마인드를 새겨주고 싶다. 흔히들 비유하는 말이지만 발레는 백조다. 백조가 물위에 떠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저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백조는 우아하게 물위에 떠있기 위해 물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발로 헤엄을 치고 있다.
발레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무대를 선사하기 위해, 수도 없이, 끝도 없이 연습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이 즐거운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백조의 호수>하면 백조가 떠오르고 <돈키호테>하면 돈키호테, 발레리노 하면 우만제가 떠올랐으면 좋겠다. 감동의 발레를 통해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싶다.

그의 발레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아직은 멀게만 느껴진다던 그가 하고픈 역할들이 가까운 미래에 올 것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만족하지 않는 발레리노가 되고 싶어 했다. 자신만의 확고한 가치관, 멈추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따르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마음가짐이 그것을 방증했다.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는 춤이 좋았다. 빌리는 국립발레학교 입학 오디션에서 "춤을 출 때 어떤 기분이 드나"는 질문에 "모르겠어요. 그냥 기분이 좋아요.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모든 걸 잊게 되고 사라져 버려요.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내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은 느낌이에요. 전 그저 한 마리의 나는 새가 되죠."라고 말했다. 인터뷰 동안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