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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to the 20s #3] 박종서 교수님의 20대 인생의 page를 엿보다
어느덧 국민대학교에 초록 나뭇잎들이 싱그럽게 물결치는 계절이 왔다. 그에 따라, 국민인 들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벌써 한 학기가 끝나 가는데, 새해의 결심은 온데간데없고 시간에 쫓겨 하루를 살아내는 나만이 남았다.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 말자. 우리나라 자동차 디자인의 선구자이자, 리더인 박종서 교수님 ( 공업디자인 전공 ) 역시 이런 시간들을 겪어 왔다고 한다. Back to the 20s 3번째 주인공 박종서 교수님을 만나 교수님의 20대 생활이 어땠는지, 당시의 많은 고민과 선택 등 슬럼프는 어떻게 벗어났는지 묘안을 여쭈어 보고 왔다.
Q. 교수님이 펴낸 책 '책 꼴, 좋다'에 보면, 교수님은 자신의 인생을 물구나무 서기 인생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자동차 디자인으로 평생을 살았지만, 자연 속에 가장 완벽하고 가장 훌륭한 디자인이 있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입니다 자연이라는 최고의 디자인을 모른 채 자동차 디자인부터 한 내 인생은 거꾸로 산 것이나 마찬 가지 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평생을 디자이너로 살아 왔으나, 지금도 나는 자연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모든 영감을 얻어. 지구의 나이로 볼 때 인간은 크리스마스쯤에 태어난 미력한 존재이니. 앞으로도 나는 풀리지 않는 모든 디자인의 문제를 자연에 묻고 그 답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Q. 학생들을 통해 교수님께서는 굉장한 달변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이유들 중 혹시 학생들이 좀 닮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요?
아이들을 마치 제 자식들처럼 대하고 얘기하다 보니, 편하게 말을 하게 되고, 그래서 그런 얘기를 듣는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나는 항상 솔직하게 말을 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일에는 많은 용기가 뒤따르기 마련이죠. 나는 이런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있어서 솔직한 편입니다. 어쩌면, 이런 말을 함에 있어서의 당당함이 나를 달변가로 만들어 줬을지도 모르겠네요.(웃음)
이런 태도 덕분에 오히려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었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모른다고 명확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가르쳐주기가 더 쉽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식의 어중간한 태도는 뭘 가르쳐 줘야 할지 명확하지 않아 오히려 알려주기가 어려습니다. 이런점은 학생들이 좀 닮았으면 좋겠네요.
Q. 요즘 청춘들의 고민 BEST를 꼽자면 뭐니 뭐니 해도 진로일 텐데요, 교수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하신 건가요?
제가 가졌던 가장 첫 번째 꿈은 화부였습니다. 화부란, 기관이나 난로에 불을 때거나 조절하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마른장작을 모아 와서 불을 피우는데 재미를 느끼곤 했습니다. 그런데 운명이라는 게 정말 신기한 것이, 초등학교에 들어와 정말 180도 다른 직업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 계기는 선생님의 칭찬 때문이었는데, 그 날은 미술 수업 중 태극기를 그려보는 날이었는데, 저는 태극기를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닌, 바람에 날린 모습을 표현해서 그렸었어요. 태극기의 살이 접힌 모습까지도. 그걸 보신 선생님께서 날 교무실에 데려가 선생님께 보여주시며, 얘가 이런 그림을 그렸다며 공개적으로 크게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 뒤로도 내게 계속 큰 관심을 보내주시며, 미술 쪽 재능을 좋게 보아 주셨는데,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이쪽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Q. 그럼,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있으셨어요?
대학에 처음 들어갈 땐, 조각가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홍대 공예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땐 뭐 조각가로 평생 먹고 살겠다거나 이런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조각하는 일이 좋았을 뿐이었지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직업의 폭이 넓었던 것도 아니고, 조각가로 살면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전자제품이 하나 둘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전자제품 디자인에 흥미를 느끼고, 일본에서 그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죠. 일본에서 연수 하던 중, 제 디자인에 대해 다룬 기사가 일본 잡지에 실렸는데, 그걸 현대자동차에서 보고 입사 제의를 해옴으로 인해 저의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인생이 시작된 겁니다.
Q. 대학시절,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일단 책을 많이 읽었죠. 그 시절에는 디자인에 관한 책이 거의 없어서, 미군 부대 쪽 헌책방들을 돌다보면, 미국의 industrial design 이라던가 디자인 관련 잡지가 가끔 나오곤 했는데, 그 책을 구하러 그 헌책방에 자주 가곤 했습니다. 그 잡지들을 보면서 새로운 디자인 세계에 눈을 많이 떴던 것 같고 또한 미술 전람회를 많이 보면서 예술적인 감성을 끌어들이려고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유화, 수채화, 스케치 같은 것들을 중시해서 대학시절 내내 항상 그림 그리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Q.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일들을 가장 하고 싶으세요? 그리고 그 이유도 말씀해 주세요.
어학을 좀 더 공부 하고 싶어요. 만일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일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등 5개 국어 정도를 더 배웠다면 정말 좋았을 것 같습니다. 언어를 배우면, 그에 따른 길들이 많이 열리기 마련인데, 어학은 내가 이 걸 배워서 뭘 하겠다고 해서 시작이 되면 안 돼는 것 같고, 어학을 배우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이 열립니다. 예를 들면, 불어를 배우면, 프랑스에서 살 기회나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게 되고. 이게 바로 준비된 자에게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어학 실력을 높인다면 그건 나만의 경쟁력이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큰 무기가 되어 줄 꺼라 생각합니다.
Q. 제가 보기엔 교수님은 정말 많은걸 이루시고, 디자인 쪽에서도 거의 정점에 계시잖아요, 그런 교수님에게도 20대 시절 놓쳤다고 생각하는 가장 아쉬운 것이 있으신가요?
물론이죠. 그 중에서 음악을 놓친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데, 현악기 보다는 관악기 쪽을 좋아해서 호른이나, 트렘펫 같은 악기 쪽으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연주자가 되고도 싶었지만 기회가 오질 않았어요. 하지만, 현대 자동차에 다니던 시절 직업으로서는 아니지만, 취미로 트럼펫, 플뤼겔호른, 소프라노 색소폰, 하모니카 같은 악기들을 배웠습니다. 특히 트럼펫은 5년 정도, 소프라노 색소폰은 8~9년 정도 배웠을 정도로 좋아했어요.
Q.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춘들에게, 당부하고 싶은게 있다면?
시작이 반이다. 저학년이라고 마음놓고 있을때가 아니다. 4학년때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 갈고 닦을것!
학생의 겉모습을 찾자. 공부를 하는 것이 학생의 가장 큰 일이 아닌가. 최대한 공부하기 편한 복장으로 학교에 오는 것이 필요하다.
나라를 사랑해라. 학생으로서, 공부를 잘 하는것도 중요하고, 열심히 스펙쌓는것도, 인성을 닦는것도 모두 중요하지만, 그 모든것들 중 가장 중요한것은 내 나라가 나의 근본임을 잊지 않는것이다.
박종서 교수님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내내 아버지와 얘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교수님이라고 하면, 뭔가 권위적이고 두려운 존재이기만 했는데, 박종서 교수님은 그 위에서 내려와 기자의 눈높이에서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셨기 때문인것 같다. 그 많은 주옥같은 말들 중 무엇보다 기자에게 가장 감명을 주었던 것은, 대학졸업 후 5년 뒤, 승자와 패자로 갈린다면, 그 기준은 떳떳함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돈을 많이 벌지 않더라도, 나 자신의 직업이나 상황에 대해 떳떳하다면 그는 승자요, 내 상황에 대해 숨기려 급급하다면 그는 패자라는 것. 당연히 돈, 명예, 혹은 권력이 기준이 되리라 생각했던 내가 너무 어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과도 아닌 기자에게 편안하게 대해 주셔서, 개인적인 질문에도 정성껏 대답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