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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 Magazine] 늦깍이 요리사, 꿈과 열정을 요리하다, Chef 김선호

  • 작성자 이민아
  • 작성일 10.10.04
  • 조회수 11694


공무원에서 요리사로 직업을 전향하게 된 계기요? 안정된 직장과 쾌적한 일상에 익숙해져 있었고 또 만족했던 건 사실이에요. 어떻게 보면 무료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스스로 느끼는 갈등은 별로 없었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자주 술자리를 가졌어요. 매일 봐도 늘 반가운 선배, 친구, 동생들을 만나며 여느 20대와 다름없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죠. 당시에 만나던 동갑내기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서래마을에서 자신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죠. 지방에서 상경해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모습이 애틋했어요. 진지한 생각까지 했었는데 여자 친구가 갑자기 이별을 통보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요. 전 심한 딜레마에 빠졌고, 때늦은 방황을 했어요. 사람이 좋아 즐기던 술자리는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술을 마시면 자제력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스물아홉이 된 지 3개월이 지나 있더군요. 제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자신을 다잡아줄 계기가 필요했던 시점이었어요. 그 수단이 바로 요리였죠. 여자 친구의 레스토랑에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요리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로 결심했어요. 생각해보니 요리를 할 때만큼 집중했던 적도 없었고, 내가 만든 요리를 친구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볼 때만큼 흐뭇했던 적이 없었더라고요. 모두가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공무원 타이틀도 제 삶에 어떤 활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요리를 배우기 위해 무작정 압구정동의 한 일식주점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전에 다니던 직장에는 과감하게 사표를 냈고요.

요리사가 된다고 했을 때 가족이며 지인들 모두 반대에 반대를 거듭했죠. 부모님과 누나는 제가 평탄한 길을 가길 원하셨어요. 그래서 택했던 직업이 공무원이기도 했고요. 남들처럼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때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최고라 생각하셨고, 저도 그전까지는 그 뜻을 따랐던 거죠.
선배들이나 친구들, 심지어 후배들도 만류했어요. 요리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취미’로 할 수 있다며 절 설득했죠. 방황할 때보다 오히려 더 잦아진 술자리에서 화제는 언제나 ‘김선호’였어요. ‘용기는 높이 사지만, 그건 아니다’라는 식의 조언은 언제나 한결같았죠.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데 솔직히 흔들렸던 적이 없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 꿈을 스스로 꺾지는 않았어요.

처음 발을 들였던 일식주점에서의 일은 요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어요. 일단 제가 했던 일이 홀서빙과 설거지였거든요. 주방에서 요리는 엄두도 못 냈고, 그저 보조로 하는 허드렛일이 제 임무의 전부였어요. 물론 그게 지금은 꽤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지만요. 허드렛일이었지만 주방장님께 정말 호되게 꾸지람을 들으면서 일했어요. 식재료 하나하나 꼼꼼히 메모하며 공부하듯이 준비해야 했습니다. 식재료와 조리방법에 대한 메모는 빼먹는 적이 없었죠. 수첩으로만 4권이나 되었어요. 공무원 시절 몸에 밴 메모하는 습관 덕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시 보면 유치한 그 메모들이 지금까지도 초심을 잃지 않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죠.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그렇게 요리의 기초를 배운 덕에 지금 제가 식재료에 대해 보다 섬세하게 접근하고, 요리에 대해 남들과 다른 생각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된 것 같아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 이후로는 어깨너머로 배운 요리를 집에서 친구들에게 만들어주던 시절 지녔던 ‘음식’에 대한 마인드를 버리고 ‘요리’라는 것에 대해 현실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여러모로 값진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일식주점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일본 신주쿠에서 스시집을 경영하시는 이모 댁에서 일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운 좋게 생겼어요. 그렇게 일본으로 떠났죠. 요리 경력이라곤 주점의 주방보조 역할밖에 없었던 제가 요리의 매력에 더 깊이 빠질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칼을 다루는 방법, 식재료에 관한 이해, 민감한 재료의 유통 등 작은 스시집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했습니다. 제가 처음 요리를 배웠던 일식주점에서도 느낀 점이지만 식당의 규모가 작아도 망하지 않는, 더 나아가 단골이 누적되는 식당들의 노하우를 엿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어요. 그렇게 스시집의 일이 손에 익어갈 무렵, 일본어를 위해 삽화가 많이 들어간 책을 한 권 산 적이 있어요. 맛집 탐방을 위주로 하는 여행정보지였는데, 그걸 보고 결심했죠. 이 맛집들 중 적어도 세 곳에서는 일을 배워보기로요. 이모는 제가 계속 식당에 남기를 원했지만 사실 저의 궁극적인 목적은 스시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어요. 세상의 무궁무진한 종류의 음식들을 배워 저만의 개성을 살린 레시피(recipe)를 만드는 것이 제 목표였거든요. 그 후 1년간 일본의 유명한 식당들을 돌며 다양한 종류의 요리를 배웠어요. 물론 대부분 무보수로 배웠습니다. 사실 요리를 배우겠다고 불쑥 찾아온 외국인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면서까지 일을 가르쳐줬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오랫동안 타지에서 무보수로 근무하다보니 그간 모아뒀던 돈은 물론 체력도 슬슬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요리를 시작하며 동경해왔던, 세계에서 외식산업이 가장 잘 발달한 도시 중 하나인 뉴욕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시적인 귀국을 택하게 됐죠.
한국에 돌아오니 다시 사람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어요. 오랜만에 어머니께서 해주신 밥을 행복하게 먹었고, 그리웠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그간 잊고 있던 즐거움을 느꼈죠.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유명 요리사 밑에서 수학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천운이 따른 거죠. 한참 요리를 배울 때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조언도 해주셨던 분이에요. 놀랍게도 저를 기억하고 계서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만난 사이였지만 주방에서 형은 저에게 혹독하고 엄격했어요. 마치 군대에 다시 끌려와 무서운 사수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죠. 저의 섬세하지 못한 칼질과 못내 아쉬운 요리 상식 때문에 엄하게 꾸지람을 들었어요. 정말이지 제 요리 인생에 있어 누구보다 고마운 분이지만, 형과 함께 하던 그 당시를 회상하면 일본에서 무보수로 일하던 시절보다 더 힘들었어요.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고요.

그런 시절을 거쳐 제가 요리에 어느 정도의 눈을 뜰 무렵, 지금 일하는 레스토랑(홍대의 플레이)의 주방장님께서 제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셨어요.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해보며 재미있게 일해보자고 하신 거죠. 국적과 문화를 초월한 획기적인, 오감을 사로잡는 레시피를 선보일 레스토랑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에 구미가 당겨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습니다.

 
비교적 짧은 요리경력이지만 동기들에 비해 나이가 많았던 그는 언제나 인생 선배이자 친근한 형처럼 동료들을 다독이는 존재였다. 잦은 술자리가 만들어낸 사교성이었을까……. 힘들어하는 후배들을 다독이고 이끌며 주방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그의 모습은 선배요리사와 오너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플레이 측의 제안은 그를 한층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엄격하지만 실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주방장으로부터 배우며 몇몇의 후배들을 다독이는 엄마 같은 역할을 맡은 그는 헤드셰프(Head Chef)란 직책을 묵묵히 수행 중이다. 아직은 부족함을 느끼기에, 그리고 아직은 더 배워 나갈 것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이기에 개인 시간에도 틈틈이 각종 요리들을 경험하러 다니고 연습한다. 물론 다양한 요리들을 맛보며 착안한 정보나 아이디어를 동료들과 공유하며 현재 일하는 레스토랑에서 다각도의 시도를 통해 새롭게 요리해 보고 있다.
“사장님과 주방장님의 마인드가 너무 좋았어요. 무언가에 정형화되지 않은 우리만의 요리를 신나게 만들어 고객들과 함께 나눠보자는 취지도 제가 지향하던 점과 맞았고요.”
그는 자신만의 레시피나 실력보다도 주방과 홀, 경영진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것을 고객감동의 제 1요소로 꼽는다. 맛있는 요리는 호텔의 스타 셰프를 통해, 혹은 대형 레스토랑에서 흔히 맛볼 수 있지만 요리사와 서비스 매니저, 경영진이 함께 어우러져 빚어내는 인간미는 여간해선 맛보기가 쉽지 않다. 김선호가 생각하는 요식업의 궁극적인 가치는 바로 이러한 ‘인간미’다.
사람을 좋아하는 그는 아직까지도 자기가 가는 길이 맞나 하는 의구심을 품기도 한다. 요리사라는 직업을 택한 이후에는 이전보다 지인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잡념들은 사라지고 오직 요리에 집중하며 흐르는 땀을 닦고 묵묵히 일할 뿐이다.
 
 

김선호 셰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것이다. 요리를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는 꿈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모든 일에 있어 단계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공무원 생활을 통해 몸에 밴 꼼꼼함으로 요리를 배우고 오너들의 경영마인드도 습득한다.
“요새 요리를 시작하는 친구들의 상당수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느낀 감동’을 재현하고 싶다고 합니다. 예컨대 스포츠 에이전트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제리 맥과이어>가 그랬듯 허영만 화백의 <식객>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요리에 대한 매력을 알려줬죠. 하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힌 그들은 일주일을 못 버티고 도망가곤 합니다. 운이 좋았던 저는 혹독하게 대하셨던 만큼 동기부여도 해주셨던 선배들 덕분에 지금까지 요리를 할 수 있었지만요.”
그는 주방에서 엄격한 위계질서와 기강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즐기면서 일할 수 있는 분위기와 동기부여, 그리고 무엇보다 요리사 자신들의 적극성과 끈기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자신의 레스토랑을 차리는 데 5년, 혹은 10년 이상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는 오늘도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인간미(人間味)를 위해 주방에 들어선다.

글 / 유한석 (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