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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웹툰작가 릴레이 인터뷰]‘힘들때는 저를 보세요’ 정헌재(회화 98) 동문

  • 작성자 이민아
  • 작성일 09.12.23
  • 조회수 15863

[들어가면서]

이 기사에는 정헌재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 작가 개인의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한 부분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일부 문장은 정 작가가 사용하지 않은 표현이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헌재야, 음료수 좀 갖다 줄까?"

2000년 7월이었다. 아버지가 문을 열고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당황했다. 아버지와 말 안 하고 지낸지 한 달이 넘어서고 있었다.

"됐어요."

건성으로 대답하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얹었다. 아버지는 결혼식장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몸 곳곳에서는 여전히 진물과 뒤범벅된 피가 흘렀다. 음식을 먹으려고 입을 벌려도 입술이 터져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나마 식사는 미음으로 대신했다. 입을 크게 벌려도 되지 않도록 밥숟갈 대신 티스푼으로 음식을 떠 넣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살이 트고 피가 터지는 고통. 나는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면 당시 고통을 이렇게 표현한다.

"커터 칼로 살을 사과껍질처럼 깎아내면 어떨 것 같아요? 바로 그 고통이에요."

실제로 그랬다. 나는 그때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감염이나 부작용으로 내가 죽어버렸으면, 남모르게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날도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때였다. 갑자기 집안이 어수선해 지더니 TV를 보시던 어머니가 구급대원들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3일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뇌출혈이었다.

꼼짝할 수 없었던 나는 병원에 3일 입원해 있는 동안 아버지를 찾아뵙지 못했고 장례식은 물론 장지에도 가지 못했다.

헷갈렸다. 내 몸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

초등학교 이후 거의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버지였다. 초등학교 때는 자식들과 마주하면 "이번 건만 되면…", 큰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다며, 조금만 견디면 우리 고생도 끝난다고 늘 헛된 희망만 주고 밖으로만 나다니시던 아버지였다.

나는 그때 알았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자식들 앞에 두고 얘기했던 "이번 건만 되면…" 이라던 헛된 말이 아버지를 지탱해 주는 힘이었다는 것을. 아버지는 정말로 큰 건을 터뜨려서 가족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는 그때 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의 꿈은 뭐니?" 

●아토피와 사투

['포엠 툰'과 '완두콩', '멈추지 말아요 완두콩씨' 등의 작품이 잇달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는 정헌재 작가(33).

정 작가의 작품에는 '빵 터지는' 반전이나 '킥킥' 보는 사람에게 웃음을 주는 내용이 없다.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큰 행복을 찾고, 절망 속에서 다행을 찾고, 내가 어려울 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보면서 위안을 삼는 내용이 시적 표현과 함께 가득하다.

정 작가가 이 같은 내용으로 카툰을 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버지의 죽음이었지만 그 전, 그 후에도 그의 삶은 희망 없이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앓아누운 것은 2000년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서 주는 약 먹으면서 학교에서 밴드활동도 하고 학과 수업도 들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본격화한 아토피 피부염과 천식은 불편하기는 했지만 괴롭지는 않았다.

1995년 국민대 금속공예학과에 입학했다가 망치질 보다는 붓이 좋아 잠시 휴학하고 재수해서 1998년 회화과로 다시 들어갔다. 그 때만 해도 나도 남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갖게 되는구나,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1999년이 되면서 몸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다리가 부어서 굽혀지지 않을 정도가 됐고 병원에서 하루 세 번 먹으라고 한 주먹씩 주는 약은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매주 두 차례 병원에서 주사까지 맞았지만 증세는 호전될 줄 몰랐다.

"약을 끊거나, 좀 조절해서 치료를 계속하자."

의사는 이렇게 얘기했지만 상태는 악화돼 정상 생활이 힘들게 됐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잘 했는지, 잘 못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의사와 병원을 불신했다.

내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도 내 몸에 맞지 않는 처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인터넷에 오른 국내외 아토피 환자들의 사연을 보고 아토피와 관련된 의학 지식을 스스로 공부하면서 나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난 일체 아토피 약과 연고, 주사를 끊고 병원도 끊었다. 그리고 그 뒤로 1년 4개월간을 방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지냈다.

영화에 보면 고문 받는 사람이 "차라리 죽여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나는 그때 그런 심정이었다.

●친구에게 선물 받은 희망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아토피의 고통. 처음에는 '내가 왜 이런 형벌을 받아야 하나' 분노하고 짜증냈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와 평생 같이 가야할 친구' 쯤으로 받아들일 줄 알게 됐다.

고통이 친구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장시간 고통을 받다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시(詩를)를 쓰기로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미술학원에서 학원비 대신 청소하면서 공부하던 시절, 학적을 유지한 채 재수 하면서 학원에서 내가 잘 하는 데생 레슨을 하고 번 돈으로 내가 취약한 수채화 학원비로 내던 시절, 선배 학원 강사한테 '찍혀서' 눈칫밥 먹으며 고생하던 시절, 기껏 대학에 입학했더니 이번에는 몸이 망가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지금의 얘기.

이런 경험 속에서 내 내면으로 경험한 깨달음과 애절함,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아름다운 글로 남겨 책을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일기도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통증이 다소 가시는 초저녁 시간에 주로 글을 써서 모아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 그리고 정확히 2002년까지 2년간 30번 정도 퇴짜를 맞았다.

보다 못한 친구가 내게 타블렛PC를 사주면서 "글과 함께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했다.

인터넷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웹에이전시를 운영하던 친구는 내 홈페이지까지 만들어 주며 "시적인 그림을 그려서 인터넷에 올려보면 글로만 하는 것 보다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친구에게 타블렛PC 사용법을 배워 이번에는 그림과 함께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2002년 겨울 '포엠 툰'(Poem Toon)이 탄생했고 2003년 여름에는 '완두콩'이 책으로 나왔다. 특히 완두콩은 무려 25만부가 팔려 나가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때 큰 돈을 만져봤다.

●평생 같이 가야할 친구, 고통

나는 차츰 나아졌다. 과자를 끊고 라면을 끊고 등산을 하고 반신욕을 하자 10년을 두고 아토피가 조금씩 호전됐다.

하지만 내가 나아진 것은 몸보다는 마음이다. 나는 아토피라는 놈으로부터 고통 속에서 희망을 찾는 법을 배웠고, 우울하고 괴로울 때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잠시 딴 세상으로 피하는 법도 알게 됐다.

책이 잘 팔리고 돈이 생기면서 아픈 아들 키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를 예전보다는 편하게 모실 수 있게 됐다.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돼 다행이다.

나는 지금 경기도 광주, 나무 많은 산 바로 앞에 집을 구해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어머니는 내가 반에서 30등을 해도 "난 널 믿는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다.

2002년, 몸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도 "친구와 함께 캐릭터 사업을 하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도 형님 둘은 "어떡하느냐"고 걱정했지만 어머니만큼은 "그래, 넌 할 수 있어"라고 힘을 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누워서 피 흘리던 2000년 어느 날 밤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고통 때문에 잠 못 이루던 새벽, 마루에서 인기척이 들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문틈으로 밖을 내다 봤더니,

어머니가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부적을 앞에 두고 기도를 하고 계셨다.

병원에서도 안 되고, 한방으로도 안 된다고 하니까 아마 점집이나 무당을 찾아가신 것 같았다.

상태가 호전됐다고는 하나 내 몸은 언제든지 하루아침에 2000년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하루라도 등산이나 반식욕을 하지 않고, 과자, 라면 입에 대고, 서울 도심에서 몇 시간씩 걸어 다니면 당장이라도 몸이 찢어지고 밥 먹으려고 입을 벌리면 입술이 갈라지고 피가 날 수 있다. 나는 이런 환영을 하루에도 수 십번씩 보며 몸서리친다.

내가 다시 아픈 상태가 된 모습이 꿈에 나타나면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난다.

그렇다. 내게 희망이란, 10년을 두고 조금씩 나아진 나의 마음과 신체가 지금 상태대로 유지되는 것 그 자체다.

삶에 있어서 희망이란, 사랑이란, 잠시라도 한눈팔면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 것과 같은, 당장이라고 깨질 것과 같은 불안한 존재. 내 몸 상태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나는 고통을 통해 알게 됐다.

행복이나 꿈에 객관적인 잣대는 없다.

고급 승용차 뒷자리에서 아버지와 함께 학원가는 길에 아버지와 말다툼을 한 학생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불행한거다.

미대 지망생인데 돈이 없어 학원 바닥 걸레질을 해도, 걸레질해서 학원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면 그건 행복이다.

나는 내 주위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행복이나 꿈에는 객관적인 잣대가 없는 만큼, 불행하거나 우울할 때는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서 꿈을 꾸는 사람을 보라고.

나를 보라고.

원문보기 : http://news.donga.com/3/all/20091222/24985863/1

출처 : 동아일보          기사입력 : 2009-12-22 1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