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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시대 서기였던 ‘부친 최인훈’ 삶과 문학 남기렵니다”/ 최윤구(대학원 국어국문학과 99 석사, 02 박사) 동문
[짬] 고 최인훈 작가 아들 최윤구·하윤나씨 부부
왼쪽부터 고 최인훈 작가의 며느리 하윤나, 아내 원영희, 아들 최윤구씨. 강성만 선임기자
“윤구야 행복해라.”
작년 7월 타계한 최인훈 작가가 아들 윤구씨에게 유언처럼 남긴 말이란다. 지난 28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자택에서 만난 아들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지난해 3월 발병하고 어찌 손을 쓸 새도 없이 병세가 악화했죠. 입원 전 세 번째로 응급실을 다녀온 새벽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많은 글과 말을 남긴 분인데, 정말 간명하고 간결하게 아들한테 바라는 바를 말씀하셨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그 말에 다 담겼죠.”
고인은 아들에게 하나를 더 당부했다. 자신의 책을 50년 동안 지켜달라는 것이다.
아들 부부는 재작년 겨울 부모님 댁으로 이사했다. “노환이 온 아버지를 누군가 수발해야 할 것 같았어요.”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발병하기 전 몇 개월 동안 시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오랜 칩거 생활에 말수가 적으셨어요. 저희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버님께 자극이 되는 것 같았어요. 한번 이야기를 하면 서너 시간씩 이어졌죠. 그 대화를 녹음해 지금도 풀고 있어요. 에이4 용지로 수백장이 됩니다.”(며느리 하윤나씨) 남편이 거들었다. “아버님 정신을 깨우는 데는 문학만큼 좋은 소재가 없다고 생각했죠. 아내가 아버님과 인생과 문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아버님이 일주일 만에 선생님 모드가 됐어요. 해방전후사, 임시정부 등에 대해 아버님이 반복적으로 아내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고인은 후기작 <화두>에서 해방 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이 끝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게 한국 현대사의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생각을 펼쳤다.
고인이 재작년 겨울부터 작년 3월 발병까지 며느리 하윤나씨와 나눈 대화 녹음을 며느리가 틈틈이 풀었다.
에이4 용지로 수백장이 된단다. 하윤나씨 제공
오는 7월 23일은 <광장>의 작가이자 한국 문학의 거목 고 최인훈 작가의 타계 1주년이다. 인터뷰 이틀 뒤 며느리는 첫 아이 준을 낳았다. 고인의 셋째 손주이자 첫 손자이다. “여동생이 딸 둘이 있죠. 아들 이름은 준입니다. 아버지 작품 주인공 이름에 준이 많이 들어갑니다. <광장>의 이명준이나 <회색인> 독고준처럼요. 아버지를 생각하며 지었죠.”
아들은 고양 지역 문화·교육계 인사들이 지난해 말부터 추진하고 있는 최인훈 도서관 건립에 의욕을 보였다. 건립 추진위는 지난해 12월 구성돼 이권우 도서평론가가 좌장을 맡고 있다. “이권우 평론가가 저한테 도서관 건립을 제안했을 때 정말 아버님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도서관이 세워질 때까지 생업처럼 힘을 보태려고 합니다.”
최윤구 하윤나 부부. 지난 30일 둘 사이에 첫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준이다.
부친 작품에 나오는 이명준, 독고준의 바로 그 준을 땄단다. 강성만 선임기자
아들 부부는 지난겨울 유튜브에 ‘최인훈연구소’ 채널을 열었다. 부친과 문학적 인연이 있는 문학계 원로들을 인터뷰해 영상을 올리고 있다. 채널을 보니 이어령, 염무웅, 김병익, 임헌영, 김주연 선생의 인터뷰가 보인다. “이 작업을 두고 염무웅 선생께서 시대의 초상이 될 것 같다고 격려하시더군요. 문학 쪽에 이런 인터뷰 영상 자료가 없는데 꽤 가치 있는 작업이 될 것 같다면서요.”
대학에서 영상 디자인을 전공한 며느리는 애초 1주기까지 시아버지 추모 다큐멘터리를 만들 참이었다. 인터뷰에 나선 이유다. “아버님의 삶을 반추하는 조문객들을 보면서 한국 지성사나 문학사가 아버님을 통해 쓰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다큐멘터리는 아버지에 대한 조명뿐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른 지식인의 생각을 따라가는 영상이 될 것 같아요. 아내 출산 때문에 제작이 늦춰졌어요. 2주기까지는 만들어야죠.” (최윤구)
아들은 아버지 문학 세계를 알리는 대중 강의도 하고 있다. 인터뷰 다음 날에도 고양시 대화고 교사들 앞에서 강의를 했다. 지난 4월부터는 고양시 한양문고에서 ‘최인훈 작품 읽기 강좌’도 하고 있다. 그는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92학번이다. 국민대에서 홍명희의 <임꺽정>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엥겔스의 ‘리얼리즘의 승리’ 개념으로 <임꺽정>을 풀었어요. 아버님이 제 논문을 매우 재미있게 보셨죠.”
새달 23일 별세 1주기 추모 행사
‘최인훈 도서관’ 건립추진위 구성
고양지역 문화교육계와 함께 진행
문학 전공 아들 ‘최인훈 읽기’ 강좌
유튜브 채널 ‘최인훈연구소’도 열어
영상 전공 며느리 ‘추모 다큐’ 제작중
아들은 아픈 10대를 보냈단다. 지금은 완치했지만 중2 때 발병해 3년 가까이 투병 생활을 했다. “하루 8시간 링거 수액을 꽂고 있기도 했죠. 그 때문에 중·고교 다 검정고시로 나왔죠. 38살 때 제가 완치 소식을 전하자 아버지가 한 번 더 검사해보라고 하시더군요. 너무 기뻐하셨죠.”
아들은 음악 칼럼니스트이다. 서양 고전음악과 오디오를 주제로 강의도 한다. “몸이 아프면서 음악을 듣기 시작했죠. 제가 중2 때 도스토옙스키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었어요. 그때 아버님이 언제 내 책을 볼 거냐고 물으시더군요. 아버지 책이 가로 편집으로 나오면 읽겠다고 답했죠. 그 무렵부터 아버님 작품을 읽었던 것 같아요.”
1992년 집에 컴퓨터가 생긴 뒤로 고인의 글은 모두 아들의 손을 거쳤다. “아버지가 시대의 서기를 자임하셨다면 저는 최인훈 선생님의 서기라고 생각했죠. 장편 <화두>는 반년 이상 작업했어요. 아버지가 어느 정도 원고를 써 주시면 제가 입력해 프린트해서 드리고 함께 토론했어요. 아버지가 인쇄된 형태로 작품이 앞에 있으면 힘을 얻는 것 같았죠.” <화두>엔 이런 협업의 결과물이 녹아있다. “<화두> 마지막을 보면 기상 음악으로 하이든 <시계 교향곡>이 나옵니다. 제가 추천했고 아버지가 적당하다고 받아들이셨죠.”
고인이 가장 좋아하는 곡은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였단다. “아버지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유모레스크>를 들려드리면 숨이 고르게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아들의 이 말에 인터뷰 자리를 지킨 고인의 아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이 유년 시절부터 이 음악을 좋아하셨어요. 저한테 자주 신청하셨죠.” 피아노 소품용이라 다소 의외라고 하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작품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소설이 <플랜더스의 개>입니다. 아버님은 이 소설을 예술가 소설로 읽으신 것 같아요.”
고 최인훈 작가가 어린 아들(윤구)을 목에 태우고 즐거워하고 있다. 아내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작가 최인훈은 전쟁과 그로 인한 민중의 고통을 깊이 사유했다. 그런 문제의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광장>일 것이다. 주인공 이명준과 발레리나 애인 은혜 그리고 은혜 배 속에 있던 아이까지 모두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죽었다. “아버님이 병석에서 남북 정상회담 뉴스를 보면서 너무 집중해 탈진할 정도였어요. 생명 유지에 가까운 상태에서 뉴스에 집중하느라 (몸 상태를 보여주는) 수치가 안 좋아졌죠. 뒤에는 건강이 걱정돼 일부러 뉴스를 전하지 않기도 했어요.” 작가는 남북 관계를 삼단뛰기에 비유했단다. “힘들고 험악한 현실에서도 계속 여러 번 시도해 이룬 평화와 통일은 더욱 위대하다고 하셨죠.”
고인의 마지막 독서가 궁금했다. 며느리 말이다. “제가 작년 2월에 <화두>를 재독하고 있었어요. 그때 남북 관계가 경색될 무렵인데 아버님이 조명희(1894~1938)의 <낙동강>을 독서대에 올려놓고 보셨어요. (아내의 말에 아들은 ‘아버님은 의식을 잃는 순간까지 텍스트를 손에 쥐고 계셨어요’라고 거들었다) 아버님은 <낙동강>과 같은 남북 공통의 읽을거리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남북통일을 하려면 정신적 통일이 필요하다면서요.”
문학과지성사가 펴내고 있는 <최인훈 전집>. “광장 개작은 지금껏 여덟 번 했죠. 가장 최근은 2010년입니다. 요즘 <광장> 한해 판매량은 대략 9천에서 1만2천부 사이입니다.”(문학과 지성사 이근혜 주간)
아들이 보는 부친의 문학 세계는? “아버님 문학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보통 관념성을 듭니다. 제가 보기에 아버님 문학은 감각적입니다. 고통의 문학이죠. 고통은 관념이 될 수 없어요. 나의 아버지는 늘 아팠어요. 제가 아버님을 간병하는 동안 앓으셨던 그 병은 끔찍한 고통을 수반합니다. 마지막에 모르핀까지 투여했어요. 아버님은 집에서 생을 마감하길 원하셨죠. 하지만 병세가 도저히 집에서 모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제가 불효스럽게도 아버님에게 아프지 않게 입원하시라고 청했고 아버님이 받아주셨어요. 그때 나의 아버지가 그렇게 아팠구나, 나의 아버지는 늘 아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버님이 산 시대가 아픔의 시대였죠.”
덧붙였다. “아버님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라는 생각을 해요. 전집이 15권이지만 논의되는 작품은 한정적입니다. 아버님은 소설가로는 잊힐망정 희곡 작가로는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고 했죠. 그만큼 희곡에 애정을 가지고 계셨어요. (아들의 이 말에 고인의 아내는 작가가 희곡을 쓸 때는 마치 신기가 오른 무당처럼 얼굴이 벌게져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집필에만 몰두했다고 회고했다) 문학 연구자들이 높이 평가하는 아버님 단편들이나 또 문명론을 펼친 중후한 에세이도 더 알려야죠. <광장>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라도 아버님 작품 전체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아버지 문학은 감각적이죠
아픔의 문학, 절대 관념일 수 없어
망명작가 조명희 <낙동강>처럼
남북 공통의 읽을 거리 강조하셨죠”
1주기 행사는 고인의 제자들과 전집을 낸 문학과지성사와 함께 준비하고 있단다. “아버님 희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초연 때 온달 어머니 역으로 나온 연극인 박정자 선생님께서 아버님 희곡 한 편을 1주기 행사에서 낭독하실 것 같아요.” 1주기를 맞아 문학과지성사에서 최인훈 중단편 선집도 나온단다. “등단작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고 천상병 시인이 한국 단편 문학의 완성이라고 칭찬한 <국도의 끝>과 같은 작품이 포함됐죠. 아버님은 천상병 시인의 이런 평가에 굉장히 만족해하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하셨어요.”
지난 7월 이후 고인이 앉아 있던 자택 소파 위엔 늘 꽃이 놓여 있다. 고인을 추모하는 가족의 마음이다. 기자가 찾은 날에는 장미와 카라, 작약꽃이 놓여 있었다. 작가의 말년 교유를 묻는 말에 고인의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두문불출하셨죠. 밥 먹고 티브이 보는 시간을 빼고는 늘 소파 위에 앉아 생각에 잠기셨어요. 운동도 따로 안 하셨어요. 억지로 등을 떠밀어 동네 공원 산책을 하셨죠.” 남편 얘기에 이내 아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고 최인훈 작가가 사색에 잠기곤 했던 자택 소파 위에는 작가 별세 이후 늘 아내와 며느리가 준비한 꽃이 놓여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염무웅 선생은 아들 부부와의 인터뷰에서 ‘생활의 냄새가 전혀 없는 분이다. 같이 밥을 먹더라도 밥맛이 어떻다거나 식당이 좋네 나쁘네 그런 말을 전혀 안 하셨다’고 고인을 기억했단다. 고인의 아내는 “남편은 제가 해주는 음식을 다 맛있다며 잘 드셨어요. 언젠가는 이런 말도 하셨죠. ‘오바마는 참 안 됐다. 이렇게 맛있는 된장찌개를 먹을 수 없다니’라고요. 저한테 립서비스한 거죠. 그 말에 고맙다고 했어요.”
윤구씨는 최근 한 강연에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을 때도 황홀했다고 털어놓았다. 무슨 말일까. “아버님은 야단을 치면서 네가 잘못했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동서고금의 고사성어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조지 워싱턴(미 초대 대통령)의 손도끼 이야기를 통해 정직을 말하셨죠. 제가 석사 논문에서 다룬 <임꺽정>도 아버지한테 꾸중을 들으며 알게 된 것 같아요. 아들한테 뭘 해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독서교육도 따로 하지 않으셨고요.”
아들이 꼽는 작가 최인훈 최고의 문장은 뭘까? 아들은 최근 자신을 경악시켰던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광장>의 한 대목이다. ‘“베토벤이 어때?” 명준은 크게 끄덕인다. 정 선생은 전축을 걸어놓는다. 부수는 듯한 비바람 대신에, 나긋나긋하고 환한 가락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로맨스’다.’ “나긋나긋하고 환하다는 묘사가 음악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고 김현 문학평론가는 1988년 일기(<행복한 책읽기>)에서 고인을 두고 “정치적으로 좌파이면서, 문학적으로 우파적인 태도를 견디어내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위대한 작가와 위대한 투사가 범주를 달리하면서 존재하는 인물이 되기를 그는 바라고 있었다”고 썼다. 아들의 말이다. “아버님은 당신이 가진 신념을 일평생 그대로 견지하셨어요. 요즘 기준의 ‘정치적 올바름’에서도 어긋남이 없으셨어요.” 예를 들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민족주의에 함몰하면 안 된다며 한국 상대편을 응원하겠다고 하셨죠. 내심은 한국을 응원하면서도요. 프랑스 전에서 박지성이 동점골을 넣자 좋아하셨어요.”
‘최인훈과 종교’를 화제에 올리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은 대표적인 무신론자이죠. 저도 그렇고요. 그런데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가족이 일종의 종교적 심성을 체험했어요. 아버님 49재를 치르고 이틀 뒤 아내 임신 소식을 들었어요. 당뇨가 있는 어머니가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다 처음으로 나타난 날 저혈당이 왔다고 해요.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부르고 깨신 뒤 아버님이 날 살렸다고 하셨죠.”
인터뷰를 마치며 계획을 물었다. “개인적으로는 서양 고전음악 에세이를 쓰고 싶어요. 아버지가 좋아한 <유모레스크>를 통해 아버님과 저와의 사적인 이야기를 담은 그런 글을 쓰고 싶어요.” ‘대중들을 위한 최인훈 문학 세계 입문서’ 기획 출판도 준비하고 있단다. “천문학자나 서양사학자처럼 문학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아버님 글에 영감을 받은 분들에게 청탁하려고 해요. 2012년 삼인 출판사에서 나온 아버님 책 <바다의 편지>도 역사학자인 오인영 선생께서 아버님 글을 모으고 해제를 쓰셨죠.”
아들은 아버지가 말년에 인터넷 서점에 오른 자신의 작품 독후감을 즐겨 읽었다면서 아버님에게 계속 새로운 독후감을 보여드리는 게 자신의 일이 될 것 같다고도 했다.
출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966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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