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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역사의 승자 무신, 의종을 무신 난 도발자로 규정/박종기(국사학과) 교수
고려 내시집단은 국왕 보좌한 신진 관료
의종은 1154년(의종8)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창건한다. 1158년(의종12)에는 ‘백주 토산(兎山)의 반월 언덕(*半月岡)은 왕조 중흥의 땅이다.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 7년 안에 금나라를 병합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따라 대궐 중흥궐(重興闕)을 창건한다. 또한 측근인 재상 김영부(金永夫)와 김관의(金寬毅)에게 『편년통록(編年通錄)』을 편찬케 한다. 1157∼116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김영부는 뒷날 의종 복위 운동을 일으킨 김보당의 부친이다. 태조 왕건 이전 왕실 세계(世系)를 정리하고, 왕실의 기원을 중국 당나라 왕실에 연결시켰다. 풍수지리 도참사상 등에 입각해 왕실과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해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1145년)와 다른 성격의 역사서다. 정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22) 의종은 서경에 행차하여 자신의 통치철학을 담은 이른바 ‘신령(新令)’을 반포하여, 음양사상·불교·선풍(仙風: 도교)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다. ‘왕조의 중흥’이 의종이 바라던 정치 세계였다. 의종은 문신귀족과 달리 왕권을 강조한 절대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사신의 평가와 같이 결코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의종의 정치를 보좌한 세력은 내시집단, 환관과 술사(術士: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집단의 세 그룹이다. 반(反)문벌귀족 세력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내시는 조선시대와 달리 국왕의 정치를 보좌한 신진기예의 관료집단이다. 일반 군인은 어느 때나 고역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의종을 호위한 친위군사인 상급 무신은 비록 정변을 일으켰지만, 평소 의종의 우대를 받았고 의종을 지지한 측근 그룹의 하나였다. 의종은 무신을 천대하지 않았다.
권력은 결코 나눠 가질 수 없다. 그로부터 나타난 폐단이 측근 그룹 가운데 내시, 환관과 술사그룹, 친위 군사그룹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나타난다. 무신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가기 위해 오문(五門) 앞에 도착했다.… 왕은 무신들이 실망하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手搏戱: 태권도의 일종)를 하게 했다. 내시 한뢰(韓賴)는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 마침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를 하다 힘이 부쳐 달아나자, 그의 뺨을 치고 비웃었다. 내시 임종식·이복기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정중부 등은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욕을 보이는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이 정중부를 달랬다.”(『고려사』 권128 정중부 열전)
무신정변이 일어난 날 낮에 벌어진 일이다. 왕은 수박희를 열어 친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했는데, 왕의 총애를 다투던 내시 출신 한뢰·이복기·임종식 등이 그 참에 불을 지른 것이다. 친위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일반 군인과는 처지가 다른, 국왕의 총애를 받은 집단이다. 모욕을 당한 이소응과 정중부는 국왕을 호위하는 친위 군사 출신이다. 모욕 사건이 발생한 그날 저녁 마침내 정변이 일어났다.
“밤이 되어 왕의 수레가 보현원에 도착했다. 이고·이의방은 왕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친위군사인)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왕이 숙소에 들어가자, 이들은 임종식·이복기·한뢰 등을 죽였다. 왕을 호위한 관료들과 환관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정중부는 왕을 개경으로 돌려보냈다.”(『고려사』 권19 의종 24년(1170) 8월)
정중부와 함께 최초의 정변을 일으킨 이의방·이고 등도 역시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였다. 이렇듯 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 그룹인 정중부 등 친위 군사들이 내시 환관과 또 다른 측근 그룹을 제거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무신에 대한 푸대접이 아니었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2003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