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전 총리 후보 이야기를 새삼 끄집어내는 것은 ‘죽은 자식 나이 세기’일 수 있다. 그는 이미 총리 후보에서 사퇴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정홍원 총리를 재신임했다. 따라서 ‘문창극씨가 총리가 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고 가정하는 것은 ‘죽은 아이가 살았다면 몇 살이나 될까’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쓸데없는 짓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씨가 낙마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 소통구조의 특징을 되짚어 보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 의미 있는 일이다.
문창극씨 사태를 통해 보면, 우리 언론은 우리 사회를 소통사회로 만들기보다는 결과적으로 불통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정보를 제공하는 공론의 장이 역설적으로 불통의 장벽을 쌓고 있다. 문창극씨에 대한 KBS 보도는 법적으로는 보호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저널리즘 관점에서는 문제가 많다. 거두절미하고 특정 부분을 편집 보도했다. 문씨가 정작 강연에서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비켜갔다. 반론권은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다른 매체들도 문씨에 대해 새로운 관점(프레임)이나 사실관계를 제공하지 못하고 기존의 친일 극우 관점을 재확인하고 보충하는 데 그쳤다. 석좌교수 임명 과정이나 대학원 재학 등에 대해서도 해명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문씨는 친일파 극우인사로 낙인 찍혔다. 교회 강연과 대학 강의 내용이 근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그를 친일 식민사관 신봉자로 볼 수 있는 합리적 증거를 제시한 매체는 없었다. 문씨가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타당해 보이지만, 그를 극우라고 칭하기에는 팩트가 부족했다. 국무총리 후보를 검증하기 위해서 언론의 비판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입장은 공감할 수 있지만, 한 명의 공적 인물을 ‘느닷없이’ 친일 식민사관론자로 매도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진실이 필요했다. 문씨의 지인들을 취재하거나 문씨가 그동안 쓴 칼럼이나 학위논문에 대해 내용 분석을 했어야 했다.
우리 언론은 이번 검증보도를 통해 진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문 후보에 대한 관련 사항을 합리적인 잣대로 제시하기보다는 각자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보도하는 데 그쳤다. 진실이라고 믿는 것과 진실은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관계가 갖는 다층적인 측면을 증거를 통해 검증하기보다는 ‘이웃이 장에 간다니 거름 지고 나서는’ 떼거리 저널리즘을 답습했다.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했으며 스스로 진리를 독점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여론 변화의 상당 부분은 언론 보도에 의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는 지금 스마트 환경으로 인해서 뉴스 순환이 대단히 빠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겹겹의 소통구조를 갖고 있다. 뉴스는 지천으로 널려 있다. 뉴스의 질이 중요해졌다. 순도 높은 정보가 필요하다. 진실과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뉴스에서 거짓과 선전, 헛정보, 역정보는 걸러져야 한다. 문씨 사태에서 보듯 우리 언론은 뉴스의 양을 채우는 데 골몰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문창극씨를 총리 후보로 찬성하는 사람보다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며느리가 미우면 손자까지 밉다’고 세월호 사태 이후 정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이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문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언론의 불통구조에 의해 제시된 친일, 식민사관, 극우 프레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MBC가 긴급 편성한 ‘문창극 대담 프로그램’ 시청률이 이례적으로 6.6%까지 기록한 것이나 교회 동영상 풀 버전을 보고 난 뒤 생각이 달라진 사람이 늘어난 것은 ‘후보 문창극’에 대한 정보 제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여론이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는 국가 권력에 의해 동원되는 기제였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언론 보도에 의해 동원되는 경향이 빈발하고 있다. 이번처럼 언론의 잘못된 여론 동원은 사회적 폐해가 심각하다. 우리는 비슷한 사례를 광우병 파동이나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 타블로 학력 위조 파동 등에서 겪은 바 있다.
공론의 장은 사실과 합리성을 존중해야 한다. 토론과 검증을 통해 확인된 사실과 합리성을 진실로 인정해야 한다. 주관적으로 판단한 정의와 가치로 각자의 행위와 주장을 진실로 인정하는 잘못된 관행을 거부해야 한다. 이번 문창극씨 낙마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진실 논쟁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특성을 띤다는 점을 알고 폭넓은 사실관계의 확인에 몰두해야 한다.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 과잉 집착하게 되면 소통구조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공통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또 과학적 논쟁을 통해 거짓을 가려내지 않고 여론의 다수결을 통해 사회적 논쟁을 조기 해소하려 한다. 진실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다수결이 필요하다면 숙성된 토론 절차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속전속결로 진실을 가려내고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힘이 들 수밖에 없다. 우리의 소통구조가 정상화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