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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Biz Prism] 획일적 대책을 죄악시했던 '세종대왕식 합리주의' / 백기복(경영학부) 교수

  • 작성자 김예나
  • 작성일 18.02.09
  • 조회수 6783

세상만사 획일적인 대책은 불만을 낳고 실패할 가능성을 높인다. 이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나 전략·정책을 펼 때 '경계조건(境界條件·boundary condition)'에 따라 해법을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경계조건이란 어떤 원리나 현상이 성립하는 영역을 뜻한다. 계절에 따라 피는 꽃이 다르고 기온에 따라 생산되는 곡식과 과일이 다르다.

'계절'과 '기온'이 경계조건이다. 기업이나 정부가 전략이나 정책을 수립할 때도 경계조건에 따라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 여름에 피는 꽃을 겨울 들판에서 기대할 수 없고 열대어를 북극 바다에서 발견할 수 없듯이 노년층을 위한 옷을 청년시장에 내놓고 직장을 원하는 청년에게 마음의 힐링만 강조하는 획일적 정책을 펴는 것은 경계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경계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나 규범으로는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때로는 엄청난 세금 낭비나 정책 실패를 가져오기도 한다. 경영학의 많은 연구가 특정 경영원리가 성립하는 경계조건을 밝히는 데 집중돼 있다.

세종대왕은 항상 경계조건을 정밀하게 고려해 정책을 폈던 인물이다. 일례로 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1420년) 4월 7일 네 번째 기사를 보자. "호조에서 계하기를 '저화(楮貨·종이돈)를 잘 통용시키려면 조건을 분명하게 알려서 거행하게 하고 엄격하게 상고해 살피며 모든 물가는 경시서(京市署)로 하여금 알아보게 해 호조에 보고하거든 모두 시가(時價)에 따라 공고해 매매하게 하되 민간에 저화가 많이 퍼지면 돈값이 떨어지고 귀해지면 오르게 되오니 그 많이 퍼지고 적게 나도는 것을 따라 그때그때 요량해 걷어들이기도 하고 내어놓기도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화폐유통정책을 펼 때 시장의 경계조건을 수시로 고려해 수급을 조율해야 한다는 것을 수백 년 전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세종의 경계조건에 대한 집착은 경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인재 육성에는 양반과 평민의 욕구 차이를 고려해 차별 정책을 폈고 백성에게 시혜를 베풀 때는 각자의 능력과 필요를 면밀히 고려해 시행했다. 세금을 정할 때도 밭의 토질과 그해의 작황을 고려해 정하도록 하는 등 매사에 경계조건을 고려해 의사결정을 했다. 세종은 획일적 대책을 죄악시했다. 이것을 '세종식 합리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적이고 획일적인 전략·정책이 낭비와 정책 실패를 가져온 사례는 무수히 많다. '황우석 논문 조작 사태'가 나자 논문 조작 감시·강화에 그치지 않고 줄기세포 연구 전체를 규제하는 정책을 편 것이 대표적이다. 유익한 줄기세포 연구의 가능성까지 제한한 것이다.

가상화폐 거래가 과열되자 거래소 자체를 폐쇄한다고 한다. 이는 새로운 사회 현상의 잠재적 이득을 검증할 수 있는 경계조건을 지우는 일이다. 대상자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보편적 복지 역시 경계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낭비다. 사업자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최저임금 인상이나 나이가 많다고 조건 없이 시혜를 베푸는 것도 경계조건을 무시한 정책이다. 모두 세종식 합리주의에 벗어나는 책략이다.

경영자들은 경계조건에 더욱 민감하다. 경계조건이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서는 조건 변화 예측과 적절한 대응이 경영의 핵심이 된다. STX나 대우그룹의 '대마불사(大馬不死)' 확장 전략은 정부의 '파산 비용 회피정책 유지'라는 경계조건을 가정해 펼쳐졌으나 조건이 바뀌면서 실패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블루오션·레드오션' 개념은 기업이 투자할 때 산업 경쟁이라는 경계조건을 면밀히 고려하라는 뜻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데이터 장악력이 곧 경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경계조건이다.

"도내(道內)에 진제장을 설치한 때부터 나와서 먹은 기민의 수와 죽은 자의 수효(數爻)를 자세히 아뢰고, 또 진제장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로(中路)에서 죽은 사람은 몇 사람이며 이미 도착해 죽은 자는 몇 사람이며 병들어 죽은 자는 무슨 증세로 죽었는가. 당시 병에 걸린 자, 본향으로 돌아간 자, 현재 있는 자, 도로에서 유이했다가 죽은 자의 수효와 역질이 있는지 없는지 모두 빨리 아뢰라."(세종실록 19년 3월 8일). 올 8월이면 세종 즉위 600년을 맞는다. 세종은 백성이 굶어 죽는 와중에서도 무조건적 구휼보다 세세한 경계조건을 고려한 '정밀 구휼'을 추구했다는 점이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원문보기: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8&no=93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