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시인(59·국민대 교수)은 35년 전 비무장지대 GP(감시초소)를 지키는 장교였다. 그는 GP 문을 열어 북파공작원을 내보내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개척해둔 소롯길에서 때로 지뢰가 터졌다. 대인지뢰는 사람을 날렸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발목지뢰는 발뒤꿈치를 앗아갔다. 사고 때마다 그는 갈기갈기 찢긴 시신을 들쳐 업고 나왔다. 피묻은 군복과 몸을 씻어내던 날 그는 시를 썼다. 이런 날의 시어들은 날이 섰다. ‘7부 능선’ ‘가시철망’ ‘수신호’ 같은 냉전의 언어들이 늙은이의 앙상한 뼈마디마냥 툭툭 불거져 나왔다.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창비)는 그때 쓴 시들이다. 그는 수십년 만에 마술 호리병의 마개를 따는 기분으로 이 시들을 자유케 했다. 신교수는 이제야 가위눌림에서 벗어난 기분이라고 말했다.
“과거의 기억이 악몽으로 남아 있었어요. 이제 속에 있던 어두운 기운을 밖으로 내보내는 느낌입니다. 제대후 지뢰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한동안 산에 가질 못했지요. 결혼한 뒤 이사도 21번이나 다녔습니다.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서….”
그는 앞서 2권의 시집을 냈다. ‘무인도를 위하여’(1977)와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2000). 첫 시집 이후 꽤 긴 침묵이 있었다.
-두 시집간의 공백이 왜 그렇게 길었습니까.
“72년쯤이던가, ‘우리들의 땅’이란 시를 ‘한국문학’에 발표했는데 당국의 검열로 앞부분이 대부분 잘려나갔죠. 북쪽의 대남방송 내용을 그대로 시어로 표현한 것이었어요. 당시 박정희 정권이 이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 다음부턴 시를 잘 쓰지 못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시로 표현했어야 내 몸의 상처, 어두운 영혼을 치유할 수 있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북파공작원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공작원, 팀장, 키퍼 3인이 한조였습니다. 나머지 둘은 공작원을 북파하기까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었죠. 공작원은 대개 브로커를 통해 이 일을 지원하는데 그때 돈으로 3백만원 정도를 보상금으로 받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작원과의 사적인 얘기는 금지돼 있었지만 단 둘이 있을 때 간혹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시 ‘마지막 그분’에 나오는 남자는 35세가량이었어요. 몸은 왜소했지만 오랜 훈련으로 단련돼 있었고 눈이 빛났어요. 그가 지닌 납작한 배낭에는 독침과 미숫가루, 육포가 들어 있었지요.”
‘…/작전에 돌입하기 직전/손마디를 하나하나 맞추며/수고스럽지만 하다가/다시 만나겠지요 하던 그분/숨소리 짜릿짜릿하던 그 순간에/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을까/그게 그분의 마지막 말일 수도 있는데/나는 왜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까/…’(마지막 그분)
그는 “155마일 휴전선에 70여개의 GP가 있는데 북파공작원을 내보내던 당시의 그 루트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했다. 임무를 마친 공작원은 퇴로에서 생사가 순식간에 결판났다.
“한 GP당 50개 정도의 스피커가 있었습니다. 이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는 일종의 암호였지요. 가령 GP장과 공작원 간 사전 약속에 따라 김추자 노래를 틀면 당초 계획을 바꿔 다른 길로 복귀하는 식이었습니다.”
신교수는 몇 년 전 자신이 가르치는 국문과 학생들을 데리고 ‘실미도’에 간 적이 있다. 실미도 영화가 나오기 훨씬 전이었다.
“‘시와 체험’이라는 수업이었지요. 학생들에게 역사적 현장에서 시를 한번 써보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몸속에 깃든 어두운 기운을 몰아내려는 저 자신의 의도도 있었고요. 제 개인의 기억으로만 머물러 있어선 안 될 일이기에 이젠 다 드러내고 싶습니다.”
비무장지대에 섰던 35년 전의 시인 신대철은 자신의 시와 일기를 훗날 부인이 될 애인에게 우편으로 보내 보존케 했다. 시는 빛을 봤고, 일기장은 아직 묻혀 있다. “그 일기장도 세월이 지나면 내놓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