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닫기

전체메뉴

Quick Menu

Quick Menu 설정

※ 퀵메뉴 메뉴에 대한 사용자 설정을 위해 쿠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뉴 체크 후 저장을 한 경우 쿠키 저장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언론속의 국민

[등불을 켜며―이의용(교회문화연구소장·국민대 겸임교수)] 버리는 기쁨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02.08.12
  • 조회수 14503


2002. 8. 12. - 국민일보 -



연초에 6년 동안 살던 집을 팔고 이사했다. 결혼생활 22년 동안 꼭 11번째 맞는 이사였다. 이사할 때마다 문제가 되는 건 역시 짐이다. 이번 이사 때도 내 책들이 큰 짐이 되었다. 이사 가기 전부터 일부 책들을 뽑아서 버렸지만, 막상 어렵게 이사를 오고 보니 괜히 가져왔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 꽤 많았다.

10여년 전엔가 이사할 때,아내가 상자에 든 책을 가리키며 버리자고 제안했다. 거기엔 대학 시절부터 보관해온 책들이 들어 있었다. 아내가 그 책들을 버리자니 처음에는 섭섭하기조차 했다. 그러나 아내의 한 마디에 나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 책들을 미련없이 쓰레기 더미에 쏟아버렸다. 그 책들은 10년 동안이나 바로 그 상자 안에 들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사를 다닐 때마다 그 무거운 걸 싸들고 다녔던 것이다. 10년 동안 보지 않은 책을 어디에 쓰려고 또 이삿짐에 포함시키느냐고 아내는 되물었다. 맞다. 그 사이에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고, 맞춤법도 바뀌었는데 그걸 왜 그리 싸들고 다녔는지 모를 일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은 버리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익숙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물건을 버릴 때마다 죄책감을 느낀다. 워낙 물자가 부족한 시대를 살아와서 그럴 것이다. 그래도 버려야 한다. 이삿짐을 정리할 때마다 그런 걸 더 느끼게 된다.

오늘도 아직 정리를 하지 못하고 쌓아둔 짐들을 바라보면서,“저걸 왜 싸들고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래서 버릴 것을 뽑아 한 곳에 모아두지만, 여기까지 끌고 온 게 아깝다는 생각에 다시 주저하게 된다.

한 번은, 자주 보지 않는 책들을 골라 교회에 갖다 쌓아놓고 교인들에게 가져가게 한 적이 있다. 뜻밖에도 반응이 좋아 그 후 몇 차례 그렇게 해봤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파트 경비실 옆에 그런 코너를 만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이번에도 이사오기 전에,고장나 쓰지 못하고 있던 구형 오디오를 후배에게 가져가라고 했다. 마침 전기공학을 공부한 친구였는데 나중에 그 집엘 가보니 말끔히 손질해 잘 사용하고 있었다. 주길 참 잘 한 것 같다.

우리 집은 2년 후에 새로운 집으로 이사갈 예정이다. 어떻게 하면 그때 이삿짐을 줄일 수 있을까. 어떤 이는 무엇이든 집안에 들여놓을 때마다 그만큼 집 밖으로 내놓으라고 권한다. 책을 한 권 샀으면 다른 한 권을 청소하라는 것이다. 남에게 주든지, 버리든지. 그렇지만 그게 실제로는 얼마나 힘든 일인가. 생각해보면 사람도 음식을 먹고는 그만큼을 내버린다. 그게 잘 안되면 큰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조건 내 영역에 쌓아놓는 데 익숙하다. 지금의 서울 동숭동 대학로 부근에 서지학자 한 분이 사셨다. 희귀한 책들을 평생 모아서 목조 건물 1층과 2층에 쌓아 두셨는데, 하루는 이 분이 외출한 사이에 책 무게를 이기지 못한 목조건물이 그만 무너지고 만 일이 있다. 책 무게라는 게 참 엄청난 것이다. 이사할 때도 책이 가장 무거운 짐이다. 요즘 우리나라의 여성잡지 중에는 1㎏을 넘는 책도 많다. 서울의 어느 대형 문고 매장에서는 여성지를 실어 나르던 수레에서 여성 잡지들이 무너져내려 ‘여성’들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무엇이든 쌓아두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평생 먹을 것보다는 일용(日用)할 양식만 구하라는 성경 말씀은 깊은 의미를 준다. 돈이든 책이든 재물이든 자기 영역에 높이 쌓아두려는 생각은 좋지 않은 것 같다. 요즘 무슨 게이트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자기 혼자 평생 먹을 것을 쌓아두려는 데서 생기는 문제가 아닌지 모르겠다.

정말 무엇이든 쌓아두면 좋지 않다. 쓸데없는 공간을 차지해서 그렇고, 그 사이에 먼지가 쌓여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이사가라고 권하고 싶다. 집 없는 이들에게는 이사가 고통이겠지만, 이사가면 버릴 수 있고, 먼지를 털어버릴 수 있고, 버린 것만큼 새로운 공간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분위기를 맞을 수 있어 좋다.

무더운 더위도 장마에 한풀 꺾이고 가을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회사든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최근 3년간 안 쓴 물건이나 서류나 책을 과감히 처분해보자. 그리고 앞으로는 뭔가를 새로 들여오면 그만큼 처분하자. 우리 마음도 그렇게 하자. 자, 오늘은 컴퓨터 안에 쌓인 많은 데이터들을 말끔히 지워볼까나. “모두 지우시겠습니까?” “예”(www.churchcultur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