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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국외독립운동사적지-동남아 실태보고서 주도한 김도형(국사80학번)동문

  • 작성자 장상수
  • 작성일 06.02.10
  • 조회수 6981

안창호, 만주韓人 필리핀 대이주 시도
 
[조선일보 2006-02-03 03:03]  

남방식민지 연대 주장한 여운형 필리핀서 억류
홍명희는 말聯 고무농장 매입… 독립자금 마련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

타이완의 신채호, 필리핀의 안창호, 싱가포르에 홍명희….


중국·러시아·미주 등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은 해로(海路)를 따라 동남아 지역에서도 불타올랐다.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처장 박유철)와 함께 베일에 가려 있던 동남아 지역의 독립운동을 파헤친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동남아지역 편’을 2일 펴냈다. 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46) 연구원은 “지난해 9~10월 타이완·싱가포르·필리핀·인도 등의 세 팀 10명의 전문가가 뛰어들어 새로운 사료를 다수 발굴했다”며 “동남아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를 현지 사적과 문헌을 통해 재조명한 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홍명희, 타이완의 신채호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는 1916년 4월,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한인 동지 3명과 함께 말레이시아의 고무농장을 매입했다.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관련 문헌은 벽초가 당시 2200여원의 큰돈을 들였던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사업이 여의치 않았던지, 1917년 10월 농장을 되팔고 사업을 접고 말았다.


1928년 4월 중국 톈진에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6만4000원의 가치가 있는 위체(爲替·외국환)를 위조했다. 일부를 중국에서 현금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단재는 나머지를 팔기 위해 5월 타이완 지룽항에 도착했다가, 현지 경찰에 체포된다. 1928년 5월 12일자 대만일일신문은 “수십 개의 가명으로 활동하던 무정부주의자 신채호가 격렬하게 저항했다”고 사건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독립기념관은 이번 조사에서 1913년 홍콩에서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이 중국 혁명정부의 도움을 받아 발간했던 독립운동 잡지 ‘향강(香江)’ 창간호를 찾아내고, 1928년 타이완에서 일왕의 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를 암살한 조명하(趙明河) 열사의 의거 장소를 정확히 확인하는 성과도 거뒀다.

 

◆필리핀의 안창호와 여운형


1929년 2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일제가 목을 죄어 오던 상하이와 만주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독립운동 거점 개척을 시도했다. 안창호는 만주의 한인들을 필리핀으로 대규모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필리핀 이민국에 찾아갔다. “일본 여권을 갖고 와야 하고, 1인당 50원의 지참금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필리핀 당국이 내건 조건. 당시 50원은 쌀 5가마 값으로, 노동자 1명 월급이 쌀 한두 말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할 때 너무 큰돈이었고, 일본 여권을 얻는 것은 더 어려웠다. 안창호는 케손(Quezon) 상원의장 등 유력인사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국 좌절하고 만다. 하지만 필리핀에 ‘대한인국민회 필리핀지부’를 설립하는 등 부분적인 성과도 있었다.


1927년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초기 임정과 사실상 결별하고 독자적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시기. 중국 상하이 푸단대 축구단을 지도하던 몽양은 이해 축구단을 이끌고 필리핀 원정을 떠났다. 몽양은 현지 환영행사에서 “남방 식민지 민중이 제국주의에 맞서 연대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가 일본측의 항의로 미국 경찰에 의해 마닐라의 중국YMCA 건물에 억류당한다. 하지만 필리핀 유력인사들의 항의로 수일 만에 풀려난 몽양은 필리핀 프레스, 라오피니온, 파가가이사 등 진보적 신문들과 연쇄 인터뷰를 갖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반제(反帝) 연대투쟁을 주장했다.


◆인도네시아의 조선 청년들


태평양전쟁 개전 뒤 일제는 3000여명의 한인 청년들을 군속으로 강제 징용해 태국, 인도네시아 등의 포로수용소에 배치했다. 이 중 인도네시아 자바의 수용소에 배치됐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1944년 12월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한다. 단원이었던 20대 초반의 청년 손양석, 민영학, 노병학 등 3명은 자바 중부 암바라와에서 일본군 무기고를 탈취, 12명의 일본 군인을 살해한 뒤 자결한다. 후일 ‘암바라와 의거’로 불리는 사건이다.


독립기념관 연구팀은 이 밖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소속으로 영국군과 함께 인도·미얀마 접경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인면(印緬·인도·미얀마)공작대’의 활약상도 현지에서 확인했다.

 

(이태훈기자 [ libr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