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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딸과 함께 책 낸 한상일(정외)교수

  • 작성자 박정석
  • 작성일 06.08.01
  • 조회수 6614
[중앙일보 이경희.신동연] 조선은 닭이었다. 혹은 어린 아이였다. 제국주의를 향해 치닫던 19세기 말과 20세기초, 일본의 각종 시사만화에서 힘없는 닭은 조선을 상징했다. 일제 통치에 대한 조선 민중의 저항은 그저 '어린 아이의 투정' 혹은어리석은 민족의 부질없는 저항으로 그려졌다. 만화왕국답게 일본은 조선 침략의 역사도 만화에 고스란히 담아 놓았다. 한상일(63·사진右)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그의 딸인 고려대 아세아연구소 선임연구원 한정선(36)씨가 총 186컷의 시사만화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재구성해 책 한권에 담았다.

아이디어는 딸이 냈다. 6~7년 전 도쿄대에서 박사 논문을 쓰던 그녀는 머리를 식힐 겸 옛날 일본 만화 잡지를 손에 잡았다.

"강의 자료로 쓰기 위해 신여성 등 당시 일본의 풍속을 담은 만화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여러 권을 뒤지다 보니 한국 관련 내용들이 자주 눈에 띄더군요."

일본 시사 만화 역사는 오래됐다. 1862년엔 시사풍자만화잡지 '재팬 펀치'가, 1877년에는 '마루마루진문(珍聞)'이, 1904년에는 일본어.한자.영어를 섞어 외국인 독자까지 노린 대형 컬러 만화잡지 '도쿄퍽'이 창간됐다.

딸은 일본 정치사 전문가인 아버지에게 만화들을 챙겨 보였다. 부녀가 머리를 맞대고 퍼즐 맞추듯 의미를 해석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2003년부터 집중적으로 자료를 수집했다. 이들 매체는 1910년 한일병합 이전까지 조선과 관련된 내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이후에는 청나라가 주요 소재로 떠올랐다. 만화들은 한결같이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침략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시사만화들은 일본 내의 정치적 문제를 풍자해 언론 자유와 인권 확대에 기여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시종일관 제국주의적인 목소리를 냈지요."(한상일)

만화에서 조선은 '일본인이 사육하거나 도마 위에 올리는 닭'으로, 청나라는 '변발(돼지꼬리)을 고수하는 전근대적인 돼지'로 묘사됐다. 반면 일본인은 마치 서양인처럼 보이는 단정한 차림새로 등장하곤 했다.

"근대적 문명을 추구하던 당시의 세계적인 흐름과 질서를 일본도 따라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논리가 짙게 깔린 겁니다."(한정선)

당연히 청일전쟁은 야만국 조선과 청나라를 개명시키기 위한 것으로 묘사됐다. 명성황후는 어린 고종을 등에 업고 대신들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 건설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동시에 여색을 탐하는 호색한으로 종종 조롱거리가 됐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초상에는 '극악 무도한 흉한'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그런 만화집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다. 일반 독자들도 전쟁에 찬동하는 만화를 투고했다. 제국주의적 시선은 만화를 통해 일반 국민에게까지 퍼진 것이다.

"지금껏 나치즘은 히틀러 탓, 파시즘은 무솔리니 탓, 일본의 침략 전쟁은 일부 군부 탓이라는 인식이 팽배했지요. 그러나 제국주의가 아래로부터 국민의 적극적 지지와 협조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한상일)

부녀는 만화를 통한 '시선의 정치'를 객관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혐한류' 만화 시리즈가 인기를 얻는 현상도 주의 깊게 바라본다. 이들 만화에서 여전히 일본인은 서양인과 비슷하게 그려지고, 한국인은 동양인의 특성인 작은 눈과 불거진 광대뼈가 강조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서양 콤플렉스와 제국주의적 시선이 뒤섞인 한 세기 전의 흐름이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녀는 "일본이 전쟁으로라도 제국주의 대열에 끼어야 했던 그때와는 시대 상황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부녀의 작업 중 일부는 외국 학회에 논문으로 발표해 영미권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일본의 시사만화에 대해 분석한 책은 많지만 일본 제국주의 시대 작품만 뽑아 분석한 경우는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부녀는 책을 일본어로 번역해 출간할 궁리도 하고 있다. 마침 국치일 100주년(2010년)이 그리 머잖다.

글=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