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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삼한 통합’ 기치 내건 견훤, 人和 실패로 스러지다/ 박종기 (국사학과) 교수
“늙은 제가 전하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의 목을 베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령한 군사를 빌려주어 난신적자를 없애주신다면 저는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견훤은 고려 귀순 1년 뒤인 936년(태조19) 6월, 왕건에게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이자 후백제의 왕인 신검(神劒)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한다. 수십 년간 자웅을 겨뤄왔던 라이벌 왕건의 무릎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들을 죽여달라는 아비 견훤의 심정은 어땠을까.
견훤은 9년 전인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기면서 “그대는 아직도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나의 털 하나 뽑아보지 못했다. (생략) 이제 강약이 분명하니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네”(『고려사』권1, 태조 10년(927) 12월)라고 왕건을 조롱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10년도 지나지 않아 이런 처지로 뒤바뀌었을까.
935년(태조18) 3월 견훤의 첫째 아들 신검은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견훤에게 반발해 동생 양검(良劍)·용검(龍劍)과 난을 일으킨다. 신검은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지금의 김제)에 유폐한 뒤 왕위를 찬탈한다. 권력은 부자 사이도 갈라서게 한다는 옛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한마디로 후백제의 자중지란(自中之亂)이었다.
왕건, 견훤을 영웅으로 극진히 대접
견훤은 왕건에게 귀부하기 직전, “내가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나의 군사는 북군(北軍)인 고려군보다 갑절이나 많은데도 이기지 못하니,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삼국유사』견훤 열전)라고 했다. 후백제의 자중지란은 고려군보다 두 배나 강한 남군(南軍·후백제군)의 군사력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역사의 경고는 이렇게도 무섭다.
졸지에 왕위를 빼앗기고 유폐된 견훤은 석 달 뒤인 935년 6월 처자식을 데리고 금산사를 탈출, 나주로 도망해 고려에 망명을 요청한다. 나주는 견훤이 오랫동안 왕건과 치열하게 싸웠던 전략 요충지였는데 그곳이 자신의 피난처가 될 줄이야. 왕건은 도망 나온 10년 연상의 견훤을 ‘상부(尙父)’라 존대하면서, 최고의 관직과 함께 남쪽 궁궐(南宮)을 거처로 제공했다. 또 양주(楊州:서울)를 식읍으로 줘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게 했다(고려사』권2 태조18년 6월조). 지난날 자신에게 엄청난 수모와 치욕을 안긴 적장을 왕건은 영웅으로 극진하게 예우했다. 영웅만이 영웅을 제대로 알고 대접하는 것일까.
견훤이 귀순한 지 5개월 뒤인 그해 11월, 신라 경순왕은 직접 개경에 와 신라의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한다. 머뭇거리던 왕건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다”고 신하들이 간하자, 그해 12월 항복을 받아들인다. 반란 왕조였던 고려는 비로소 한반도의 정통 왕조가 된다. 이듬해(936년) 2월, 신검의 매형이자 견훤의 사위인 장군 박영규(朴英規)도 고려에 귀순한다. 박영규는 지금의 순천에 근거지를 뒀던 서남해 해상세력의 대표주자이자, 후백제 해군 주력부대의 사령관 격이었다. 귀순의 도미노 현상이라 할까.
아비를 내쫓고 동생을 죽인 후백제의 정변과 견훤·경순왕의 귀순은 권력을 잡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후백제왕 신검을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뜨리고, 군사강국 후백제의 종말을 재촉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반세기 동안 끌어온 후삼국 전쟁의 승부추가 고려로 기울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9843
출처 : 중앙선데이 기사보도 2013.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