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퀵메뉴 메뉴에 대한 사용자 설정을 위해 쿠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뉴 체크 후 저장을 한 경우 쿠키 저장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중앙선데이]송나라 사신 서긍 “왕씨 선조는 고구려의 대족”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⑤ 왕조의 뿌리/박종기(국사학과) 교수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발굴된 ‘지안고구려비’의 진위 여부를 놓고 지난 3일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한 학술회의는 비를 발견해
분석한 중국학자까지 참석했지만 아무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끝났다(중앙일보 4월 15일자 ‘고구려비 논란만 더 키웠다’ 기사
참조).
지난해 7월 발견됐던 비문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아, 위작설까지 나오고 있다. 공개되지 않은 비문을 분석한 중국의 보고서에
매달려 진행된 학술회의를 지켜보면서, 동북공정의 악몽이 다시 새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심지어 고려 왕조가 한반도에 중국인의 후예가
세운 중국의 세 번째 지방정권이라는 2007년 중국 측의 주장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쇠붙이조차 삼켜버리는 ‘불가사리’ 같은 동북공정이 고려
역사에까지 촉수를 뻗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장의 내용과 근거를 살펴보는 것도 고려사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930년 후백제와의 고창(지금의 안동)전투에서 승리하여 크게 사기가 오른 고려는 정권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932년(태조15) 중국 후당(後唐:923~936년)에 사신을 보낸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후당은 이듬해 3월 사신 왕경(王瓊)과 양소업(楊昭業)을 보내,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는 조서를 보낸다. 『고려사』에는 왕건 및 처 유씨(柳氏)의 책봉조서, 책봉과 함께 물품을 보낸다는 조서, 3군의 군사에게 국왕 책봉을 알리는 조서 등 모두 4통의 조서가 실려 있어(권2 태조 16년(933) 3월조 참고), 그런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中 학자 “중국이 한반도에 세운 세 번째 정권”
중국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후비 유씨(柳氏)의
책봉조서다. 그 가운데 “그대(*왕건)는 장회(長淮)의 무족(茂族:번성한 명문의 족속)이며 창해(漲海)의 웅번(雄蕃)이다.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영토를 보유하고 충효의 절개로 중국의 교화와 풍속을 받았다.”(又詔曰 卿 長淮茂族 漲海雄蕃 以文武之才 控玆土宇 以忠孝之節 來化風)란 구절이
있다. 중국 학자에 따르면, 장회(長淮)의 ‘장’은 길다는 뜻의 수식어이며, ‘회’는 중국의 회하(淮河), 혹은 회하 유역이다. ‘창해의
웅번’은 바다 건너 커다란 번국의 제후라는 뜻이다. 송나라가 고려 성종을 책봉한 985년(성종4) 조서에도 “항상 백제(*삼한)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장회 출신인 너의 족속을 영원히 번창케 하라”(常安百濟之民, 永茂長淮之族;『고려사』권3·성종 4년(985) 5월조)란 구절이
다시 언급돼 있다. 중국 학자는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왕건(고려왕실)의 선조는 중국 회하 유역의 명문거족이고, 왕건은 회하 유역 한족(漢族)의
후예로 단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 회하 명문거족의 후예인 왕건이 중국의 바다 건너편에 제후국 고려를 건국했다는 것이다.
또한 왕건 책봉조서에 나온 “(그대 왕건은) 주몽이 개국한 상서로움을 이어받아 그 나라의 군장이 되었고, 기자가 번국(蕃國)을 이룩한 자취를
밟았도다”(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란 구절도 문제가 됐다. 왕건은 조선반도 역사상 주몽과 기자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온
통치자로서, 고려왕조의 군장이 되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한인(漢人)의 후예인 왕건이 세운 왕조이며, 기자조선 고구려에 이어 중국이
한반도에 세운 세 번째 정권이라고 주장했다.[史長樂, ‘당(*후당)나라 명종이 밝힌 고려 태조 왕건의 족적(族籍)’
『동북사지(東北史地)』2007년 3호(5-6월호)]. 최근 문제의 고구려비가 발견된 지린성에는 동북공정을 처음 발의한 지린성 사회과학원이 있다.
이곳에서 발간된 격월간 역사잡지에서 이런 주장이 나온 것이다.
출처 : 중앙선데이 기사보도 2013.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