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퀵메뉴 메뉴에 대한 사용자 설정을 위해 쿠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뉴 체크 후 저장을 한 경우 쿠키 저장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중앙선데이] ‘쓴소리 학자’ 최승로 재상 앉혀 국가 틀 잡다/박종기(국사학과) 교수
고려의 6대 국왕 성종(成宗·981~997년 재위, 960~997년)에 대해 고려 후기 유학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했다. 학교 재정을 넉넉하게 해 선비를 양성했고, 직접 시험을 치러 어진 사람을 구했다. 수령을 독려하여 어려운 백성을 돕게 하고, 효성과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 (중략) 뜻이 있어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성종이야말로 바로 그런 어진 군주(賢主)다.”(『고려사』 권3 성종 16년 10월)
성종이 고려 종묘와 사직의 완성, 인재의 양성과 발탁, 민생의 교화와 안정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현군(賢君)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에게 붙여진 묘호(廟號:국왕 제사 때 호칭)인 ‘성종(成宗)’은 한 왕조의 기틀이 되는 이른바 ‘법과 제도’를 완성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조선의 법과 제도를 담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을 완성한 국왕을 성종(1469~1494년)이라 했듯이 고려의 성종 역시 그런 호칭에 걸맞은 군주였다.
그러나 성종은 왕실 안팎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즉위하지는 못했다. 전왕 경종에게 아들 ‘송’(誦:성종 사후 목종으로 즉위)이 있어 경종의 사촌인 성종은 왕위 계승의 적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경종이 숨질 때 아들 송은 두 살에불과해 22세인 성종이 대신 즉위한 것이다. 성종은 전왕 경종과 후왕 목종의 모후의 출신지인 서경세력보다는 광종의 외가인 태조의 3비 충주 유씨 세력의 지원으로 즉위했다. 혼인 경험이 있던 광종의 딸 문덕(文德)왕후와 재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증거다.
경종의 사촌 … 두 살짜리 조카 제치고 즉위
경종은 재위 6년 만에 숨졌다. 광종의 무자비한 숙청에 피해를 본 세력이 여전히 조야에 포진하고 있어 광종의 개혁정치는 실종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성종은 광종의 정치를 계승하여 고려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17년 재위 기간 중 거란과 전쟁까지 치렀지만, 성종은 고려의 역대 국왕 가운데 ‘어진 군주(賢主)’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치세술(治世術)은 무엇일까?
우선 성종은 즉위 직후 언로(言路)를 개방했다. 5품 이상 모든 관료에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 성종의 귀에 거슬릴 정도로 성종을 비판한 28가지 조항의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상소가 전해지고 있다. 시무상소에서 최승로는 광종의 개혁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광종 즉위 후 8년간의 정치는 깨끗하고 공평하였으며, 상벌에서 지나침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인 쌍기를 등용한 후 그를 지나치게 대우하면서 재주 없는 자들이 함부로 벼슬길로 나아갔다. (중략) 광종은 화풍(華風:중국의 선진문물제도)을 존중했으나, 중국의 아름다운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사(華士:중국 선비)를 예우했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를 얻지 못했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경주 출신의 신라계 유학자인 최승로는 광종이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과, 과거를 통해 발탁된 신진세력에 의존해 개혁을 하려다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개혁을 주도할 만한 인재가 부족해 개혁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호족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옛 신라와 후백제 출신의 유교 정치가들도 광종 개혁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보고 익힌 뒤 귀국해 태조 때 중용되어 크게 활동했다. 그런데 광종은 이들을 배제하고 쌍기와 같은 중국계 귀화관료를 중용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했다. 최승로는 그러한 광종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의 대표격이다.
즉위 직후 광종의 정책을 계승하려던 성종에게 최승로는 마뜩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이같이 비판적인 인물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광종이 추구한 화풍정책의 한계를 보완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한 것이다. 군주들이 언로를 열다가도 따가운 비판에 마음을 닫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성종은 끝까지 마음을 열어 신하들의 비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인적 청산에 치중한 광종과 달리 성종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고려의 법과 제도를 완성했다. 즉 최승로 계통의 ‘화풍파’(중국 문물 도입을 주장하는 유학자 집단) 관료들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3성6부와 같은 정치제도 및 2군6위와 같은 군사제도를 완비했다. 또한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가 직접 지방을 지배하도록 행정제도도 개혁했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0607
출처 : 중앙선데이 기사보도 2013.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