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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카리스마·애국심·여성미 … 옷깃 위에서 그들은 말한다/전용일(금속공예학과) 교수
대통령과 함께 그의 장신구도 움직였다. 후보 시절부터 ‘박근혜 브로치’를 유행시켰던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중국 방문에서도 장신구를 문화외교의 한 수단으로 삼았다. 노랑·분홍·보라 등 상황에 맞춰 칼라코드를 강조한 재킷과 장신구가 한 조를 이뤘다.
빨강·노랑·보라 … 의상과 한 조 이뤄
시작은 무채색 브로치였다. 흰 재킷에 카리스마를 더한 검은 윤곽선이 브로치 외곽을 휘도는 선에서 반복됐다. 이들 이미지는 중국에 도착해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대통령의 뒤로 보이던 태극기의 팔괘 형상과 어우러졌다.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회담할 때는 노란 재킷 위의 옥색 장신구가 시각적 구심점을 이뤘다. 꽃잎 모양은 다소 진부했지만, 이를 모던한 초커(Choker·목에 달라붙은 짧은 목걸이)형 목걸이로 상쇄해 대통령의 활동성을 전달했다. 칭화대(淸華大) 강연에서는 검정색 카보숑(Cabochon·둥그스름하게 간 보석)형 브로치가 보라색 재킷과 한 조를 이뤘다. 중국 대학생들에게 진중한 이미지를 전했다.
또 시 주석 부부와의 오찬에서는 여성적 면모에 초점을 맞춰 분홍 의상에 액센트를 더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안(西安) 방문길엔 정상 회담의 무게감을 덜어낸 듯 가장 구상적인 나비 모양 브로치를 택했다. 재킷의 하늘색을 배경으로 나는 듯하다. 대통령과 함께 움직인 이들 장신구는 전통과 상징으로 가득한 문화대국 중국에 한국의 이미지를 전하는 매개체로 기능했다.
장신구는 단순한 시각적 치장물이 아니다. 풍부한 표현의 매체이자 발언도구로 사용돼왔다. 특히 지난 세기 후반부터는 각국의 유수한 미술대학이 양성한 장신구 작가들이 자국의 문화적 전통과 기술, 시대적 감각을 종합한 예술품으로 장신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시대 여성 지도자들이 착용한 장신구는 그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메르켈, 삼색 국기 응용한 목걸이 즐겨
예컨대 독일의 첫 여성 지도자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목걸이를 좋아한다. 2006년 한 독일 장신구 작가가 제작한 ‘앙겔라를 위한 오마주’는 독일의 삼색 국기를 응용한 간결한 형태의 목걸이다. 독일 특유의 기하학적 추상미와 공간감이 돋보인다.
2010년 방한 중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이 착용한 목걸이는 대담한 구성과 색감을 강조했다. 두 사람 다 장신구가 착용자의 분신인 듯 어울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비결이 뭘까. 바로 옷을 고를 때 장신구를 위한 여백을 고려할 줄 아는 능력이다. 잘 어울리는 장신구에는 주변과의 조화에 대한 고민이 녹아 있다.
브로치는 장신구 중 가장 독립적·공격적이다. 때문에 정치적 표현을 꾀하는 이들이 선호한다.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장신구 역사에 남을 만한 브로치 애호가다. 재임 시절 장신구를 통한 수많은 외교 발언을 했다. 2000년 북한 김정일 주석과 만났을 때 그는 자존심과 애국심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브로치를 선택했다.
김 주석과 올브라이트 전 장관 모두 커 보이기 위해 굽 높은 구두를 신었다. 주민 모두가 김일성 배지를 달아야 하는 북한 독재에 대한 반발로 울브라이트는 성조기 브로치를 골랐다고 말했다. 장신구로 ‘대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중국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의회 연설에서는 용을 주제로 한 칠보 장신구로 우호적 제스처를 보였다. 르완다 학살을 추모하는 자리에서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모양, 넬슨 만델라와 만날 때에는 아프리카 초원을 뛰는 듯한 얼룩말 브로치를 착용했다.
박 대통령의 장신구, 다소 보수적
박 대통령의 장신구도 일종의 정치적 구호 역할을 했다. 지난해 대선 기간 중 즐겨 착용했던 ‘박근혜 브로치’는 남대문 시장에서 유통되는 저가형 상품으로, 서민경제를 끌어안겠다는 후보자의 구호와 맞아떨어졌다. 후보자는 대통령이 되었고, 장신구는 선거의 무게에서 벗어나 새로운 옷을 입고 있다. 대통령의 장신구에는 전국민의 문화 수준과 동시대 미감을 반영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상징성이 요구된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이번 방중에서 보여준 박 대통령의 장신구는 다소 보수적이며, 그 자체로 존재감을 발하기보다 의상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문 것이 많았다. 국제 무대에서 활약 중인 한국의 현대 장신구 작가도 많다. 대통령의 몸 위에서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빛날 때, 가장 생생하고 효과적인 웅변이 되지 않을까.
전용일(금속공예가·국민대 교수)
◆전용일=1956년생. 서울대 응용미술과 및 동대학원, 미국 마이애미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현대 장신구전인 ‘장식과 환영-현대 장신구의 세계’를 기획했다.
원문보기 :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3/07/02/11555619.html?cloc=olink|article|default
출처 : 중앙일보 기사보도 2013.07.01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