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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중앙선데이] 송·거란·여진 사이 줄타기 외교 … 103년 만에 보주 탈환/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작성자 조수영
  • 작성일 13.08.05
  • 조회수 9384

1117년(예종 12) 3월, 금나라의 공격에 쫓긴 거란이 보주성에서 철수한다. 고려는 마침내 보주성을 고려 영토로 편입하고, 보주를 의주(義州)로 명칭을 고친다. 1014년 이래 103년 동안 고려가 기울인 적공(積功)이 백년 영토분쟁을 종결시킨 것이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국왕 예종에게 올린 신하들의 글은 감격에 겨워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압록강의 옛 터(*보주)와 계림의 옛 땅은 멀리 선조 때부터 옷깃과 허리띠와 같이 우리나라를 둘러싼 요새였습니다. 중간에 거란에게 빼앗겨, 사람들은 분노했고 신(神)조차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거란과 금나라가 다투어 보주성의 향방이 어찌 될까 걱정했는데, 하늘이 금나라로 하여금 이 땅을 우리에게 헌납하도록 길을 열었고, 거란이 성을 버리고 도망했으니 이는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곳의 우물과 연못이 우리 땅이 되어, 세금을 매기고 농사를 지어 우리의 영토를 넓히게 되었습니다.”(『고려사』 권14 예종 12년 3월)

압록강에서 한반도 남쪽 끝 계림의 땅까지 전부 우리 땅이라는 분명한 영토의식을 보여주는 글의 하나다. 보주성 탈환에 인간이 아닌 신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은 수사일 뿐이다. 그 뒤엔 고려 특유의 유연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외교전략이 발휘됐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읽어야 백년 영토분쟁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현종·덕종·정종·문종은 아비(현종)에 이어 아들(*덕종)이 그를 이었으며, 형이 죽자 동생(*정종과 문종)이 각각 왕위를 잇는 일이 거의 80년이나 되었다. (왕조의) 전성기라 할 만하다. (중략) 문종은 불필요한 관원을 줄이고 일을 간소하게 하였고, 비용을 줄여 나라가 부유하게 되었다. 큰 창고의 곡식이 썩어 문드러져,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태평성대라 불렀다.”(『고려사』 권9 문종 37년 이제현의 문종 사찬)

고려 말 역사가 이제현은 현종(顯宗:1009~1031년 재위), 덕종(德宗:1031~1034년 재위), 정종(靖宗:1034~1046년 재위), 문종(文宗:1046~1083년 재위)으로 이어지는 80년간을 고려왕조의 전성기로 쳤다. 특히 문종 때를 일컬어 고려가 가장 번성한 태평성대라 했다. 그러나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란 말이 있듯이, 전성기를 이끈 국왕 문종에게도 걱정은 있었다.

태평성대에 재개된 거란의 도발
1038년(정종 5) 거란과의 타협으로 소강상태였던 보주성 문제가 문종 때 다시 불거진 것이다. 고려가 보주성 탈환을 위해 군사적 공세를 취했던 덕종 때와 달리 이번엔 거란이 보주성을 거점으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이 사실은 1055년(문종 9) 7월 고려가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보낸 항의문서에서 확인된다.

“고려는 기자의 나라를 이어받아 압록강을 경계선으로 삼았다. 전 태후(前 太后:거란 성종의 모후)께서도 압록강을 경계로 삼게 했는데, 귀국(거란)은 우리 영토에 들어와서 다리를 놓고 성을 설치했다. 요즘엔 보주성에 군사시설을 증강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놀라게 했다. 황제(거란 왕)에게 보고하여 귀국이 설치한 다리와 보주성의 군사시설을 철거하여 영토를 우리에게 반환해 주기 바란다.”(『고려사』 권7)

한 해 전(1054년) 7월 거란이 보주성에 신설한 군사시설 철거와 영토 반환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1038년(정종 5) 타협을 본 보주성 문제가 거란의 군사시설 증강으로 16년 만에 다시 분쟁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듬해(1056년) 거란은 보주성 일대에서 농경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거란의 도발을 무력화하기 위해 고려가 선택한 수단은 외교 전략이었다. 1071년(문종 25) 3월 고려는 송나라와 50년 만에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두 나라의 연합을 가장 꺼려 하는 거란의 약점을 노린 것이었다.
1004년 거란과의 영토전쟁에서 패해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치욕을 당해 온 송나라는 신종(神宗: 1068~1085년 재위) 때 신법당(新法党:신종의 후원 아래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신법(新法)’으로 혁신정치를 편 왕안석을 지지한 정파)이 집권한다. 신법당은 거란을 제압하기 위해 그 배후의 고려와 연합한다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의 외교전략을 수립한다. 고려는 송나라의 이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외교관계를 재개한 두 나라는 이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교류한다. 송나라와 거란의 대립을 적절하게 이용해 영토분쟁을 유리하게 이끈 고려식 등거리 실리외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고려와 송나라의 외교관계 재개로 군사시설 증강 같은 무력시위가 실익이 없다는 사실을 안 거란은 보주의 영유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 일대에 무역장을 설치하는 정책으로 선회한다. 고려에 대한 거란의 무역장 설치 요구는 선종(1084∼1094년 재위) 때 본격화한다.

보주는 한반도와 대륙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자, 압록강 일대의 교역 중심지였다. 거란은 보주의 교역권을 장악해 이익을 챙기는 한편으로 그 영유권을 영구화하려 했던 것이다. 고려가 무역장 설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다.

“거란이 각장(榷場:무역장)을 압록강 언덕에 설치할 것을 의논하자, 이를 알아챈 고려는 중추원 부사 이안(李顔)으로 하여금 대장경을 분향하는 임무를 진 것처럼 가장하게 해 귀주(龜州)에 보냈다. 몰래 변방의 일(*전쟁)에 대비하게 했다.”(『고려사』 권10)

1088년(선종) 2월의 일이다. 고려는 강동 6성 가운데 최고 요새인 귀주성에 군사를 파견한다. 전쟁을 각오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어 이해 9월 고려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 무역장 철회를 요구한다.

“(압록강 양안에 각각 성을 쌓아 두 나라의 영토로 삼으라는) 994년 (거란)성종(聖宗) 교서의 먹도 마르기 전에 1014년엔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아 길을 통했습니다. (중략) 몇 차례 글을 올려 성곽의 철거를 요구했는데,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신시(新市:무역장)를 경영한다고 하니, 선조(先朝:거란 성종)의 남긴 뜻을 어기는 일이며, 소국(*고려)이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옳게 여기지 않는 듯합니다. 수 천리 길에 수레(*사신)의 왕래가 게으름을 잊고 90년 동안 공물을 바친 공로가 헛것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탄식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려는 선대를 이어 바깥 울타리를 지키던(*제후의 역할) 얼마간의 즐거움이 다시 분노로 바뀌게 됩니다. 어찌 조그만 이익을 가지고 서로 원망을 맺어야 합니까?”(『고려사』 권10 선종 5년(1088) 9월)

거란이 무역장 설치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고려는 제후의 의무를 버리고 원망(*전투)을 맺을지 모른다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내용이 들어 있다. 그 때문일까? 거란은 이해 11월 고려 사신이 귀국하는 편에 보낸 답서에서 “무역장 설치는 아직 논의 중인 사안이므로 고려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고 밝힌다. 사실상 무역장 설치 계획을 철회하겠다는 뜻이다. 이로써 이 문제는 마무리된다.

전쟁 각오한 항의로 무역장 철회시켜
고려의 요구에 거란이 왜 쉽사리 응했을까? 고려는 친송 대신 친거란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하고, 거란은 무역장을 포기한 맞바꿈의 결과였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급변하기 시작한 대륙의 정세 때문이었다. 여진족이 점차 강성해(1115년 금나라 건국) 고려와 거란 양국 국경을 침범하고 있었다. 여진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위기의식을 두 나라는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처하는 게 양국 간 영토분쟁보다 더 화급했다. 영토분쟁으로 여진족에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안겨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려가 1104년(숙종 9)과 1107년(예종 2), 두 차례에 걸쳐 여진 정벌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새로운 정세 변화가 영토분쟁을 잠시 뒷전으로 접어두게 했던 것이다. 당시 고려가 친송 대신 친거란 정책을 편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보주성 반환의 끈을 놓지 않았다. 1115년(예종 10) 1월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은 곧바로 이웃 거란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다급해진 거란은 이해 8월과 11월 거듭 원병을 요청하지만 고려는 거부한다. 1116년 8월 금나라가 보주성을 공격하자, 고려는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 보주성은 원래 고려 영토란 사실을 알리고 탈환 후 반환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금나라는 고려가 직접 보주성을 탈환하라고 대답해 고려의 보주성 점령을 허용한다. 고려를 우군으로 삼아 거란과의 연합을 막으려는 금나라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고려는 금나라의 이런 의도를 미리 꿰뚫고, 금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1117년(예종 12) 3월 금나라의 공격으로 보주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고려는 마침내 군사를 동원해 보주성을 점령한다. 이어 보주를 의주라 명칭을 고치고, 고려 영토에 편입한다.

영토분쟁이 전쟁 일보직전으로 치닫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고려는 거란과 금나라에 대해 적대정책 대신 신뢰와 화해의 외교전술을 구사했다. 즉 여진족(금나라)에 공동으로 대응하겠다는 외교·군사적 신뢰를 거란에 보여주는 한편으로, 거란의 군사요청을 거부해 신흥 강국 금나라를 안심시킨 것이다. 보주를 둘러싼 백년의 영토분쟁을 종결시킨 건 이렇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던 고려의 유연한 외교전략이었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1023

출처 : 중앙선데이 기사보도 2013.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