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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고려, 금나라 ‘신하’로 전락 … 묘청의 난 불씨 되다/박종기(국사학과) 교수
역사 속에서 권력은 언제나 현실주의자의 몫이었다. 이상주의자에게 권력은 아침 햇살 앞의 이슬에 불과했다. 현실정치의 작동 원리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거란에게 당한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시도한 송(宋)나라의 왕안석이나 현실정치의 개혁을 추진한 고려의 숙종과 윤관이 그런 존재였다.
숙종의 사후 안식처인 ‘천수사(天壽寺) 공사를 중단하라’는 관료집단의 매정한 요구는 현실정치의 냉혹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진 정벌 한 해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때 예종은 국정쇄신을 위해 신하들에게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당장에 부닥친 문제가 천수사 건립 문제였다.
“짐은 천수사 공사를 둘러싼 찬반 논의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선왕(*숙종)께서 공사를 시작했을 땐 반대가 없었는데 승하하신 이후에야 공사를 중지하라는 여론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지세의 길흉을 따져 중단을 요구한 것은 하찮은 이유에 불과하다. 천수사를 세우려 한 선왕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 다만 올봄에 공사를 강행한 것은 잘못이니, 3년 후에 시행할 것이다.”(『고려사』 권12 예종 원년(1106) 7월조)
천수사는 숙종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숙종의 원찰(願刹·죽은 이의 명복을 빌던 법당)이다. 역대 국왕은 모두 원찰을 지어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숙종 재위 땐 반대하지 않다가 관료집단이 사후에야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관료들은 선왕의 명복을 빌 장소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 속엔 숙종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담겨 있다. 그런데 예종은 이를 묵살한다. 3년 뒤 공사를 재개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석 달 뒤인 이해 10월 윤관에게 명령해 공사를 강행한다. 이듬해에는 윤관을 앞세워 여진 정벌을 강행한다. 현실정치를 무시한 예종의 정치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자겸, 측근에게 피살 … ‘석 달 천하’ 종지부
예종의 사후 왕실의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국은 급변한다. 잡은 권력은 쉽게 놓치지 않는 법이다. 이자겸은 예종의 아들이자 외손자인 인종에게 다시 두 딸을 비로 들인다. 인종은 모후의 여동생인 두 명의 이모를 비로 맞아들인다.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 된 이자겸은 왕권을 압도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절대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자겸은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시키고 관직을 팔아 자기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 고려 최고작위)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 국왕 생일에만 붙이는 이름)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고려사』 권127 이자겸 열전)
1126년(인종4) 2월 인종은 측근 김찬·안보린 등을 시켜 외척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그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다. 거사에 실패한 뒤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거처할 정도로 왕실과 국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석 달 후 인종은 이자겸 측근인 척준경을 회유해 이자겸을 제거한다. 이자겸의 ‘석 달 천하’는 막을 내린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새로운 사태가 불거진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125년(인종3) 5월 금나라는 고려가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신(臣)이라 하지 않고 황제라 표현한 것을 구실로 삼아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한다. 금나라는 형제맹약을 했던 고려에 신하의 예를 취하라고 압박한다. 조정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중국의) 한나라가 흉노에게, 당나라가 돌궐에게 혹은 신하라 일컫고 혹은 공주를 시집보내어 무릇 화친할 일은 모두 했습니다. 지금 송나라도 거란과 서로 백숙형제(伯叔兄弟)가 되어 대대로 화친하여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오랑캐 나라에 굴하여 섬기는 것은 이른바 성인은 ‘임시방편(權)으로 도(道)를 이룬다’는 것으로, 국가를 보전하는 좋은 계책입니다.”(『고려사』 권97 김부의(金富儀) 열전)
외척 발호와 문벌귀족 失政에 민심 이반
1125년 5월 금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한 직후에 김부식의 아우 김부의가 제기한 견해이다. 이에 ‘대신들은 반대하고 금나라 사신을 베어 죽이자고 극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상들은 이를 비웃고 배척하여 금나라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고려사』 권97 김부의 열전). 그러나 김부의의 견해 속엔 군신관계라는 형식적인 관계를 통해 고려의 안정을 유지하자는 현실론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김부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 주장이 당시 조야에 먹혀들어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고 권력자 이자겸도 김부의와 같은 견해였다.
“금나라가 옛날에는 작은 나라로 요나라와 우리나라를 섬겼으나, 지금 갑자기 중흥하여 요와 송을 멸했다. 그들은 정치를 잘하고 군사가 날로 강해지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어 형세로 보아 섬기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옛날 어진 왕의 도리이니, 마땅히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려사절요』 권9 인종 4년 3월조)
이자겸은 이듬해(1126년) 3월 마침내 금나라에 칭신(稱臣)하기로 결정한다. 고려는 거란과 약 100년간의 분쟁을 벌인 끝에 보주(保州)를 금나라의 양해를 받아 1117년(예종10) 고려 영토로 귀속시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발생한 신흥강국 금나라와의 마찰은 지배층에게 커다란 부담이 됐을 것이다. 칭신 결정을 내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급 관료집단과 일반인의 생각은 달랐다. 금나라에 대한 칭신을 고려왕조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이자겸의 난 이후 나타난 외척의 발호, 개경 중심 문벌 귀족의 현실주의 정책에 대한 평소의 불만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이런 불만은 묘청의 난으로 폭발한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1858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