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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천민 출신 권력자, 실권 넘어 왕권을 꿈꾸다/박종기(국사학과) 교수
500년(918∼1392년)의 고려 역사에서 특이하게도 100년쯤은 무신정권(1170~1270년) 시대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들은 ‘고려왕조 멸망의 계기는 무신정권 때부터’라고 혹평했다. ‘의종과 명종(무신정변) 이후 권세 가진 간사한 무리[權姦]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여 나라 근본을 깎고 상하게 하고 비용을 함부로 사용해 나라 창고가 텅 비었다’(『고려사』 권78 식화지 서문)는 식의 평가가 그렇다. 그렇지만 무신정권 붕괴 후 고려왕조는 120년이나 더 지속한다. 다양한 고려의 역사를 너무 단순화해 버렸다.
무신정권을 혹평한 까닭에는 당시의 권력자 이의민(李義旼·1184∼1196년 집권)도 포함된다. 그는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250년 고려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의 한 사람이다. 국왕과 관료집단 중심의 왕정 체제를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였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라는 기치를 내세워 1198년(신종1)에 일어난 만적(萬積)의 난도 이의민이 뿌린 씨앗에서 발아한 데 불과하다. 그는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무신의 전형적인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의종 허리 꺾어 곤원사 연못에 던져
그러나 의종 시해의 죄과는 그를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1179년(명종9) 정중부를 제거한 무신 경대승(慶大升)은 왕정 체제를 부활하려 했다. 그러면서 국왕을 시해한 이의민을 제거해야 할 첫 번째 인물로 규정한다. 이의민은 1181년 경주로 피신한다. 국왕은 그의 반란을 염려해 벼슬을 주고 귀경을 권유한다. 1184년 경대승이 병사한 것을 계기로 재상이 되어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의민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193년(명종23) 경주 인근 운문사(雲門寺:경북 청도군 소재)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경남 밀양시)의 효심(孝心)이 봉기하자 사령관 전존걸(全存傑)은 장군 이지순(李至純) 등을 거느리고 진압에 나섰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은 반적들에게 몰래 정보를 주고 의복과 식량 등을 보냈다. 반적들도 금은보화를 그에게 뇌물로 보냈다. 이 때문에 진압군은 이길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사령관 전존걸은 ‘만약 법으로 이지순을 처벌하면 그 아비(이의민)가 반드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이 더욱 기세를 떨쳐 아군이 패배할 것이다. 패배의 죄를 누가 지겠는가?’라고 분하게 여겼다. 마침내 그는 약을 마시고 자결했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순의 단순한 탐욕이 아니었다. 이의민이 반군과 내통하여 새 왕조를 건국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것이다.
“이의민은 일찍이 붉은 무지개가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꿈을 꾼 후 대망을 품었다. 또한 용의 자손(고려 왕실을 뜻한)은 12대로 끝나고 다시 십팔자(十八子)가 나타난다는 옛 예언을 듣고, 십팔자는 이(李)씨를 뜻한 말이란 사실도 알았다. 이로써 그는 왕이 되려는 헛된 야망을 품고 탐욕스러운 마음을 억누르고 명사들을 등용시켜 자신도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다. 경주 출신인 그는 신라를 부흥시키겠다는 뜻을 몰래 가지고 반적 김사미·효심 등과 내통했다. 반적들도 엄청난 재물을 바쳤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이의민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유일한 무신 권력자였다. 국왕과 관료 중심의 왕정체제에 기생하여 경제·군사·인사권을 독점해 달콤한 권력에 안주하려 한 정중부·경대승·최충헌 등의 무신 권력자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었다.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가 진압된 후인 1196년(명종26) 4월 이의민은 냉정한 권력자이자 또 다른 야심가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제거된다.
“적신 이의민은 잔인한 성품으로 윗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기고 임금의 자리마저 흔들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재앙이 불꽃처럼 치솟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에 신들이 폐하의 신령스러운 위엄을 빌려 적신들을 단번에 쓸어 없애버렸습니다. 폐하께서는 낡은 제도를 혁파하고 새 정치를 펼치기 바랍니다. 오직 태조께서 가르치신 전범(典範:훈요십조)을 준수하여 중흥의 길을 밝게 여시기 바랍니다.”(『고려사』 권129 최충헌 열전)
최충헌은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노회한 인물이었다. 새 왕조가 아니라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를 연장시키겠다는 현실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이는 이의민 제거의 명분일 뿐만 아니라 국왕과 관료집단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더 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이의민 실각하자 경주서 신라부흥운동
최충헌의 집안은 부친과 외조부 모두 상장군 출신인 무반 가문이었다. 그 덕에 그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의 혜택으로 관료가 되었다. 이의민과는 신분이 달랐다. 무신정변으로 무신이 득세하자 자신의 출세에 유리한 무반으로 관직을 바꾼다. 1174년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해 별장(정7품 벼슬)으로 승진한 후 안동부사(副使)와 안렴사를 거쳐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의민의 미움을 받아 관리생활을 포기하다, 1193년 장군(정4품)에 임명되어 다시 정계에 등장한 후 3년 만에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의민이 제거된 후유증은 1202년(신종5) 11월 경주의 신라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이의민 제거 후 최충헌이 경주에 있던 이의민의 삼족(친족·외족·처족)을 살육한 데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주 사람이 신라 부흥운동을 꾀하여 몰래 배원우를 (전라도) 고부군에 유배된 전 장군 석성주에게 보내 ‘고려 왕업은 거의 다 되었다. 신라가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대를 왕으로 삼아 사평도(沙平渡:한강)로써 경계를 삼으려 한다’ 하면서 그를 꾀었다.”(『고려사절요』 권14 신종 5년 11월)
최충헌은 1204년 이 난을 진압한다. 새 왕조를 건설하려 한 이의민의 꿈은 이로써 좌절된다. 최충헌은 아들에서 증손자까지 ‘이(怡)-항(沆)-의(竩)’로 이어지는 62년간(1196∼1258년)의 최씨 정권을 열었다. 그 비결은 변혁을 바라지 않은 국왕과 관료집단의 여망을 정확하게 꿰뚫은 현실주의 정치이념이었다. 그는 이의민과는 다른 정치이념으로 정권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2082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