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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골목길 끝에서 마주친 ‘임정요인들의 애끓는 갈망’/ 경영대학
지난 9일 오후 국민대 대한민국임시정부 루트 탐방단을 태운 버스가 도착한 곳은 중국 장쑤성 전장(鎭江)시의 싼강(三巷)광장. 광장 한쪽 상가에는 술, 과일, 폭죽 등을 쌓아놓은 채 춘제(1월31일)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시민들의 종종걸음에서 벌써 명절 분위기가 느껴졌다.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구불구불한 좁은 후퉁(胡同·중국의 골목길)을 10분 가까이 걷다보니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공터가 나타난다.
전장시 룬저우취(潤州區) 문화관 광장. 20세기 초반 이곳에는 무위안(穆源) 소학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문화관이 들어서 시민교육문화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고 무위안 소학교의 자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학교 건물 일부가 ‘전장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사료진열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진열관으로 들어가니 1930년대 전장시기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담은 사진·지도, 설명문 등이 게시돼 있었다. 한 기록에는 임시정부가 이곳에서 한국 국민당을 건립했으며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간부들을 훈련시키는 등 중일전쟁기에 전시체제를 정비했다고 설명돼 있다. 또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강호가 전장시 베이구산(北固山) 절벽에 새긴 ‘소제암(笑啼巖)’ 각자 사진을 통해 당시 항일투사들이 웃지도 울지도 못한 세월을 보냈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대지>의 작가 펄벅이 한국 독립운동 지원 사실을 소개한 글도 흥미로웠다. 당시 전장에 거주했던 펄벅은 임시정부의 투쟁 소식을 접하고 1937년 8월15일자 중국 신문에 ‘한국인은 응당 자치를 해야 한다’는 문장을 발표하는 등 한국의 항일투쟁을 지원했다.
■ 중국서 13년 떠돌이 생활의 희미한 흔적들
‘전장시기’로 불리는 1935~1937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중 가장 어려운 시기로 꼽힌다. 변변한 정부 청사를 마련하지 못했으며 임정 요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는 바람에 항일투쟁의 역사도 제대로 정리돼 있지 않다. 오죽했으면 <한국독립운동사>에 ‘임시정부가 전장으로 옮긴 후의 활동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기록했을까.
그러나 전장시 룬저우취 인민정부가 주관이 돼 지난해 5월 문을 연 사료진열관은 전장시기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이곳 역사학자들은 무위안 소학교와 함께 마자강(馬家巷) 15호, 첸스의원(千世醫院) 등 전장 내 임정 활동기지 5곳을 찾아내 소개하기도 했다. 왜 중국의 지방정부는 이토록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의 연구·조사·전시에 힘을 쏟고 있을까.
사료진열관 개관에 참여한 전장시 외사처의 진성룽(金升龍) 부처장은 그 이유로 중·한 우호를 꼽았다. “전장시는 통일신라 때부터 한국과 교류를 이어온 유서깊은 도시입니다. 고려의 이제현과 조선의 김종직의 문집에는 전장의 풍광을 읊은 시를 남겼습니다. 물론 가장 활발한 교류는 항일투쟁기에 있었던 양국 연대 투쟁이고요. 사료진열관 개관에는 중국이 한국과 맺어온 항일투쟁의 연대 정신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창장 이남 중국 남부지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 근거지였다.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 최초의 민주 공화정부로서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운동의 최고 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중국 내륙을 전전해야 했다.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난 이후 항저우~샤오싱~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중국의 지방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의 자취를 보존하고 기념한 것은 장쑤성 전장뿐만이 아니었다. 중국 남부에 산재한 임정의 옛 청사나 거주지들이 중국 정부의 손길로 속속 복원·관리되고 있었다.
11일 찾아간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 ‘후볜춘(湖邊村) 23호’는 항저우의 명승지 시후(西湖)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인근의 아파트 시세가 ㎡당 10만위안(약 1750만원)에 달해 주거지로 재개발할 경우 시세차익이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항저우시는 개발 대신 유적지 보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는 이곳을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고 2007년 11월 임시정부 항저우 청사를 복원, 유적지 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다. 1~2층 460여㎡를 전시장으로 꾸민 항저우 임정기념관은 임정 수립과 활동, 항저우 시기 임정 요인, 임정 이동시기의 활동, 임정 요인의 유묵 등으로 꾸며져 임정의 활동과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탐방단의 국민대 서혜정씨(경영정보 4)는 “독립운동에 대해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임정 요인들이 살았던 현장에 와서 보니 그들의 광복에 대한 의지와 노력이 생생하게 느껴진다”며 “이런 게 살아있는 역사교육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항저우 기념관의 자오성수(趙盛姝) 관장은 “중국 정부가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는 부동산 개발 대신 청사 보존에 나선 것은 한국과의 관계를 먼저 고려한 것”이라며 “항저우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꼭 찾아줄 것”을 당부했다.
한국 독립운동 유적지에 대한 중국의 관심은 기대 이상이었다. 임시정부 청사가 있었거나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의 피난처로 확인되는 지역에는 거의 대부분 기념관이 세워져 있었다.
■ 충칭의 청사 정문 글자 70여년 전 사진 속 모습 그대로
임시정부 기념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상하이 임정 청사는 한·중 수교 직후인 1993년 원형 복원됐다. 상하이 중심가에 위치해 상하이를 찾는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들르는 명소로 한 해 30만여명이 찾는다고 한다.
항저우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자싱(嘉興)에는 김구의 피난처와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가 원형 복원되어 있다. 김구 주석이 일제의 갑작스러운 수색에 대비해 사용한 비상탈출구와 작은 나룻배가 복원돼 있는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엿보게 한다. 저장성은 이들 기념관을 모두 성(省)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해 보존·관리하고 있다.
임시정부 탐방단이 지난 14일 방문한 충칭(重慶) 임시정부 청사는 ‘임정 청사 단지’라고 불릴 만했다. 다른 지역 임정 청사는 단독건물로 이뤄진 반면 이곳에는 임정 요인들이 사용했던 건물 5동이 고스란이 한 곳에 보존돼 있다. 임정 청사임을 알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정문의 글자는 70여년 전 사진 속 모습 그대로다. 충칭시 위중취 롄화츠 38호에 위치한 이곳은 수십층의 빌딩, 아파트로 에워싸여 있어 충칭시 정부가 임정 청사 보존에 공을 들였음을 느끼게 한다. 기념관에서는 현재 12명의 직원이 전시 안내, 자료수집, 교육 등의 일을 맡고 있다. 그러나 연간 관람객은 2만5000명 정도로 상하이 청사의 10%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대부분이 중국인이며 한국인은 연 2000여명에 불과하다. 충칭이 중국 내륙 깊숙이 위치해 있어 교민과 관광객이 적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장을 맡고 있는 자칭하이(賈慶海·60)는 “아직 한국인 관람객은 적지만 이곳 전시장은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인 임시정부를 새롭게 바라보고 한국 상품이나 한국인에 대해 더욱 좋은 인식을 제고시키는 등 한·중 우호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탐방단은 임정의 마지막 활동 근거지였던 충칭 청사 기념관의 전시실, 임시의원 회의실, 광복군 군사활동 전시실 등을 둘러본 뒤 청사 앞 계단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 계단은 환국을 앞둔 1945년 11월4일 김구, 신익희 등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마지막 기념촬영을 했던 곳이다.
국민대 탐방단은 지난 7~15일 8박9일간 상하이에서 충칭에 이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취를 좇으며 임정 청사와 근거지, 요원들의 활동상을 되짚었다. 국민대 경영대학생이 중심이 된 탐방단은 임정 청사 탐방과 함께 저장성 웨시우(越秀) 외국어대학에서의 중국근현대사 수업, 난징대학살기념관 관람, 기아자동차(옌청)·한국타이어(충칭) 현지 공장 견학 등의 프로그램도 가졌다.
국민대학교는 해공 신익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1946년 건국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했다. 이번 탐방은 건학이념인 독립정신을 재학생들에게 체험케 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행사를 기획하고 탐방단을 이끈 국민대 김용민 경영대학장은 긴 여정을 마무리하며 임정 탐방 프로그램이 지속됐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했다. “국민대의 설립 이념인 임시정부의 독립정신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학교 국사학과의 도움을 받아 기획하게 됐습니다. 실제 와서 보니 임정 요인들이 어마어마하게 척박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초인적인 활동을 한 것을 알고서 감격스러웠습니다. 앞으로는 경영대학뿐 아니라 국민대 전체 프로그램으로 지속됐으면 좋겠습니다. ”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1172055475&code=96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