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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칼럼]관행과 범죄, 그리고 그 뒤의 ‘험한 세상’ / 김병준(행정정책학부) 교수
정부 일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권위주의 정부 아래 고위 공직을 지낸 선배 한 분이 입을 열었다. “당신들 보고 있으면 참 답답해. 투자가 일어나게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해.” 그 말을 받아 말했다. 챙기긴 하는데 부족한 모양이라고, 좋은 방안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그가 의기양양, 자랑스럽게 말했다. “재벌들부터 불러놓고 투자하라고 해. 겁도 주고, 봐줄 일 있으면 봐준다고 하면서 말이야. 우리 경제가 어떻게 일어났어. 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거야. 권력 쥐고 뭐해. 그런 거 하는 거야.”
그가 하라는 일, 그 일은 범죄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이라 하여 기업의 경영자율권을 보장하는 헌법이 없었고 직권남용을 규정한 법이 없었겠나. 그때도 범죄였고 지금도 범죄다. 그러고도 감옥 가지 않은 것은 권위주의 정권 아래 너도나도 눈을 감았기 때문이고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 때문일까, 아니면 법이 현실에 너무 앞서거나 뒤처져서일까. 법에 어긋난 일들이 여전히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곤 한다. 작게는 행정 편의를 봐주는 일에서부터, 크게는 청와대 참모가 대통령이나 총리와 상의 없이 행정기관에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 것까지 그렇다.
하지만 관행은 관행, 법이 아니다. 힘을 가졌거나 목소리가 큰 누가, 또는 집단이 법을 강하게 들이밀면 그 순간 그 관행을 덮고 있던 면죄부는 사라지게 된다. 관행은 곧바로 ‘탈법’과 ‘범죄’로 규정되고 이를 행한 공직자는 ‘범죄자’가 된다. 잘못된 관행이 칼날이요, 그 바로 뒤에는 그야말로 험한 세상이 있는 것이다.
청와대가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를 가져다 쓴 것도 그렇다. 애초부터 법을 위반한 행위였다. 예나 지금이나 청와대가 다른 국가기관의 예산을 적절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원하는 대로 가져다 쓸 수 있다고 규정한 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간 그렇게 해왔다. 한두 정부의 청와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청와대가 그 돈을 가져다 썼다. 대통령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특활비가 있다. 그런 걸 늘리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회에 늘려 달라 사정하는 게 싫고, 언론과 국민으로부터 돈을 많이 쓴다는 소리도 듣기 싫었던 것이다.
이제 이 관행은 범죄로 규정됐다. 그리고 전직 국정원장 등 이 관행을 따른 공직자들은 ‘범죄자’가 됐다. 잘못된 관행이 바로 칼날이고, 그 뒤에 바로 험한 세상이 있는 줄을 몰랐던 탓이다. 그저 쉽게 처리하고자 관행을 따라간 것이 죄였다.
일부에서는 과거의 관행적 행위를 ‘범죄’라 할 수 있느냐 한다. 하지만 아니다. 잘못된 관행들을 덮고 있는 면죄부를 하나씩 걷어내야 지금의 잘못된 관행들을 고쳐 나가게 된다. 또 공직사회 내에서 이 잘못된 관행을 따르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된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도 법과 규정을 넘는 일들이 관행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래의 ‘범죄자’들이 잉태되고 있다. 관행을 덮고 있는 면죄부를 걷어내는 순간 ‘범죄자’가 돼 험한 세상을 보게 될 공직자가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을 그냥 둬서 되겠나.
기왕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역대 청와대가 깊이 관여해온 특별교부세, 즉 지역에 특별한 행정수요가 발생했을 때 교부하는 자금 문제를 보자. 하나의 예로 말이다. 지방교부세법 어디를 봐도 특별교부세 수혜자를 청와대가 결정한다는 구절이 없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그 일부의 결정권을 담당 부처로부터 할당받아, 마치 청와대 돈인 양 활용하곤 했다.
이건 회계처리가 투명한 것이라, 또 돈을 직접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가 결정해서 담당 부처로 지시하는 것이라 괜찮다고? 글쎄, 그런가? 어느 법에 그렇게 해도 된다고 적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