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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빙상의 여제들, 그들의 패션 체계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작성자 박차현
  • 작성일 19.08.28
  • 조회수 3870

빙상의 여제들, 그들의 패션 체계

우리의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생물학적 몸과 그 몸이 사회에 등장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사회적 몸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사회적인 몸을 만드는 기본 장치는 옷이다. 그러므로 옷은 당연히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식별력이 뚜렷하며 움직이는 기호로 작용한다. 탐미주의 작가로 유명한 오스카 와일드가 “오직 얄팍한 사람만이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Only shallow people do not judge people by looking)”라고 했듯이, 신분 체계가 무너진 현대사회에서 옷은 그 사람의 취향과 더불어 상징, 지위를 드러내는 직접적인 기호 체계이기도 하다. 개인은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는 가장 쉬운 도구로 패션의 기호 체계를 사용한다. 그럼 스포츠에서 이 패션은 어떻게 디자인되고 있을까?

조현신  사진 동아일보DB 

 

공기저항을 최대한 줄인 선수복과 밀착된 이상화의 몸은 맹렬한 스피드스케이팅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테크놀로지의 천의무봉 경지 
빙속의 여제 이상화의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피날레.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3연패에 실패하고 울던 이상화의 모습은 온 국민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500m에서 36초 36의 세계기록을 보유한 여제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스스케이팅 선수복에는 최첨단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으며, 스피드스케이팅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의 국립항공우주연구소에서 만들었다. 0.01초 차로 승부가 결정되는 경기이니만큼 CAE(Computer Aided Engineering) 해석 기술이라는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표면의 저항계수와 선수 주변의 유동장까지 해석해 내서 만드는 옷이라고 한다. 이 선수복을 위해 무려 50억 원이 들어갔다고도 한다. 스케이트뿐 아니라 수영복, 사이클 등에 이미 적용되고 있는 이 기술로 실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 네덜란드 선수단의 유니폼은 봉제선이 없는 옷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첨단 테크놀로지를 통해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하는 최고의 기술적 경지에 이미 다다른 것이다.


오로지 기능 하나. 공기저항을 최대한 줄인 선수복과 그대로 밀착된 그의 몸은 맹렬한 스피드스케이팅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어떤 사념도 어떤 작위도 없는 그의 시선은 전방을 향해 고정되어 있으며 온몸은 그야말로 포환처럼 질주한다. 이때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옷이라기보다 피부 같았다. 여러 대회를 치르는 내내 그가 입은 선수복에는 간단한 선이나 색이 들어갔고, 태극기, 후원 업체의 로고가 달려 있었지만 관객의 눈에는 그것조차 들어올 여지가 없다. 그의 질주만이 밀림 속 포식자를 닮은 맹렬한 아름다움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피겨스케이팅복은 하늘거리는 시폰과 스팽글, 크리스털로 장식되어 조명 아래서 현란하게 반짝인다.

 

반짝이는 장식의 쾌감 
이 반대편에 또 하나의 대조되는 아름다움, 김연아의 연기가 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눈빛과 표정으로 극한의 감정을 보여 주며 펼쳐지는 손끝 하나로 내면을 표출해야 한다. 자연히 그가 입는 옷 또한 그가 선택한 곡명, 연출해야 할 스텝과 기술을 보여 줄 것으로 디자인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피겨스케이팅복은 하늘거리는 시폰과 스팽글, 크리스털로 장식되어 조명 아래서 현란하게 반짝인다. 여자 선수는 스커트, 남자 선수는 긴바지를 반드시 입어야 하는 규정이 있으며 부적합한 의상은 감점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다.


김연아가 평창 올림픽 성화 점화 때 입은 옷은 순백의 드레스이다. 높이 솟은 달항아리의 순백색, 김연아 선수의 흰 드레스는 백의민족의 상징이었으며, 여왕으로서의 지위를 보여 주는 결정체였다. 그가 회전할 때 샤넬 길이의 스커트는 순수한 꽃과 같이 부드럽게 펼쳐졌으며, 커다란 단추, 칼라, 장갑, 모자에서는 크리스털이 조명을 받으며 끊임없이 반짝였다.


그가 그동안 입은 모든 선수복, 즉 빨강, 보라, 노랑, 하늘색, 청자색, 검은색 등 갖가지 색의 드레스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이며, 모든 옷에 반짝임, 스커트와 소매의 하늘거리는 화사함이 가미되어 있다. 이것은 시각 유혹과 유희의 극한 장치들로서 기능과는 상관없이 망막적 쾌감만을 부추긴다.

 

이제 기능은 오히려 기본으로
감추어지고, 유혹과 장식, 
유희의 표시들이 스포츠복에 
빠르게 유입될 것

 

근사한 옷 한 벌의 백일몽 
이렇게 모순된 체계의 공존, 즉 기능과 순수 장식의 두 가지 패션 시스템이 스포츠 선수복에서도 재미있게 드러나고 있다. 몇 해 전부터인가 세계적인 톱 디자이너들이 각국의 올림픽 유니폼을 디자인하고 있다. 이제 기능은 오히려 기본으로 감추어지고, 유혹과 장식, 유희의 표시들이 모든 스포츠복에 아주 빠르게 유입될 것이다. 스포츠에서조차 이러하니, 우리의 일상에서 생물학적 몸을 가리는 기능적 패션은 이제 의미가 없다. 혹 고도의 기능성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어떤 시각적 유혹과 유희의 패션으로 디자인되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사회적 지위, 즉 우리가 앉는 식탁이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1984>의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호주머니에 달랑 돈 몇 푼 지닌 빈털터리, 어떤 희망도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사한 새 옷을 입었을 때, 당신은 거리 한 모퉁이에서 클라크 게이블이나 그레타 가르보가 되는 백일몽을 꿀 수 있을 것이다.” 


*클라크 케이블, 그레타 가르보: 1930년대와 40년대를 풍미한 영화배우로, 할리우드의 제왕, 할리우드의 여왕으로 불리웠다.


글을 쓴 조현신은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화에 관심이 많다. 작년에 <감각과 일상의 한국 디자인문화사>를 출간했다.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 이 기사는 별도의 저작권 요청을 통해 게재 허락을 받았습니다.

 

원문보기: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3484802&memberNo=628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