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변혁기의 역사이다. 변화에는 언제나 위기가 뒤따른다. 그런 시대일 수록 다재다능한 인물이 등장하고,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고려 숙종(1054~1105년,재위 1096~1105년)이 통치하던 12세기초도 그랬다. 한국사에서 전례없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앞세운 개혁정책이 추진됐고, 이를 둘러싼 논의가 풍미했다. 그러나 변혁기든, 안정기든 변하지 않은 진리가 있다.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개혁은 실패한다는 점이다. 12세기초 고려 역사는 그런 점에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수도를 옮기자
숙종 원년(1096년) 술사(術士) 김위제는 수도 천도론을 제기했다. 수도를 개경에서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 옮기자는 것. “개국후 160여 년이 지난후 남경에 도읍을 옮기면 36나라가 고려에 조공을 바친다”는 신라말 고려초 승려 도선의 풍수도참사상을 근거로 내세웠다. 후삼국을 통합한 936년을 기점으로 할 경우 이 무렵은 개국후 160년이 된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적절한 시점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왜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수도 천도론을 제기했을까? 사회 전반에 팽배했던 위기의식이 이유였다.
위기의 조짐은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당시 권세가들은 강제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거나 대외무역에 뛰어들어 유통권까지 장악했다. 이들에게 시달린 백성들의 불만은 쌓이고 쌓여 도적이 되거나 유민이 되어 이곳 저곳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미륵불이 출현했다느니 하는 각종 유언비어도 난무했다. 나라 밖으로는 여진족이 점차 강성하여 흩어진 부족을 통합하면서 힘을 불려갔다. 여진족은 고려 국경에 출몰했고, 군사 충돌이 잦아지면서 대외적인 긴장감이 고조됐다. 그러나 숙종이 느꼈던 더 큰 위기감은 200여 년을 유지해왔던 왕실이 외척세력에 의해 유린당해, 혈통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절박함이었다.
◆외척의 위세에 눌린 왕실
당시 왕실을 위협한 세력은 인주(仁州) 이씨였다. 문종때 수상을 지낸 이자연(李子淵)은 세 딸을 문종에게 출가시켰다. 13남 2녀나 되는 문종의 자식은 모두 이자연의 외손이었다. 숙종은 3남이었다. 숙종을 포함해 세명이 국왕이 되었을 정도로 자식들도 출중했다. 공교롭게도 이자연의 세딸 이외, 다른 2명의 왕비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니 이 집안의 위세는 왕실을 압도하는 형국이었다. 문종의 둘째 아들 선종이 죽자 그 아들 헌종이 11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병 때문에 왕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어머니인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그 틈을 이용해 외삼촌 이자의(李資義)가 궁정을 들락거리면서 태후와 짜고서 헌종의 배 다른 동생을 왕으로 세울 것을 모의하였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계림공(뒤에 숙종)은 마침내 왕국모 고의화 등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이자의와 태후 등을 처단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조의 최고 경영자로서 외척의 기세를 누르고 통치 기반을 확고히 다지면서, 나라 안팎의 위기를 일거에 타개하기 위해 숙종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공리(功利)주의 정책을 어젠다로 제시했다.
◆부국강병의 개혁
즉위 직후 김위제의 입을 빌려 제기된 수도 천도론은 숙종의 정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숙종은 해동통보 등 각종 화폐를 만들고 그것을 유통시키기 위해 수도 개경과 서경에 상점을 설치했다. 점차 강성해지는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해 윤관을 사령관으로 삼아 여진정벌을 단행했다. 정벌을 계기로 새로운 군사조직 별무반을 창설하여 국가가 전국의 군역 자원을 직접 장악한 계기를 만들었다. 수도 천도론·화폐 유통·여진 정벌로 상징되는 숙종의 부국강병책은 아들 예종의 치세 전반기까지 약 15년간 지속됐다. 예종의 치세에도 2차 여진 정벌이 단행됐고, 서경 천도가 새롭게 제기됐다.
숙종의 정책은 당시 송나라에서 시행된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모델로 삼았다. 고려사에서도 그것을 신법이라 불렀다. 적극적인 대외 경략과 과감한 재정개혁을 통해 개인이나 사문(私門)이 아닌 국가의 부(富)를 확대하는 정책이다. 하지만 문벌의 발호를 막고 왕권 강화를 위해 숙종이 내놓은 처방전은 엄청난 부작용을 낳았다.
일반 백성들과 관료들의 생각은 달랐다. 신법으로 국왕권은 강화됐으나, 4~5년에 걸쳐 여진정벌과 수도 천도사업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다(十室九空)’는 당시 기록이 말해주듯이 백성들은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해 집을 버리고 도망하는 현상이 만연했다. 여우의 위협을 겨우 벗어나자 호랑이가 덮친 격이었다.
관료들도 ‘민생안정’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기존의 구법(舊法)만이라도 제대로 시행하면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고 숙종에게 건의했다. 부국강병의 무모한 정책보다는 관리의 도덕성 함양과 수양을 통해 관료사회를 일신하여 민심을 얻으면 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날이 살림살이가 피폐해 가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휴식시켜야 한다는, 민생의 안정을 중시하는 이른바 ‘식민(息民)’의 논리가 그 속에 깔려 있었다.
◆지지받지 못한 개혁의 말로
기세 등등한 숙종의 개혁 추진에 관료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숙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한 후 부왕의 정책을 계승하자 반발은 거세게 일었다. 관료들은 화폐 유통책의 중지를 건의하였다. 여진정벌로 얻은 9성을 여진에게 반환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중지하자고 건의했다. 관료들은 여진정벌 사령관 윤관에게 패전의 책임을 거론하였다.
국왕이 거부하자 고위 관료들은 수십일간 출근을 하지 않으면서 국왕을 옥죄었다. 마침내 9성의 반환이 이루어 졌고, 처벌 대신 윤관의 공신호만 박탈하는 조건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화폐 유통도, 수도 천도도 흐지부지되면서 고려왕조 최초의 실험이었던 부국강병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숙종의 부국강병책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상대방의 이해와 설득을 얻지 못한 개혁,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개혁은 끝내 실패하게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한국사 j9922@mail.kookmin.ac.kr )
◆대각국사 의천-윤관 숙종개혁의 쌍두마차
숙종은 개혁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세력을 끌어안으려 노력했다. 외척세력을 제거하고 국왕으로 즉위하는데 도움을 준 세력은 왕국모, 고의화 등 무장집단이었다. 즉위한 뒤에는 이들 대신 선종의 근신이자 고위 관료집단인 김상기 최사추 등까지 등용했다. 일반 관료집단의 지지를 이끌어내 정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들은 숙종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숙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측근을 중심으로 자신의 개혁정책을 밀고 나갔다. 그의 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앞장선 측근은 대각국사 의천(義天)과 윤관이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분열된 불교교단을 통합하여 숙종의 정치적인 부담을 덜어줬다. 의천은 직접 송나라에 가서 왕안석의 신법을 체득하여 숙종에게 시행을 건의했다. 화폐 유통책은 그의 아이디어였다.
윤관은 숙종 즉위의 정당성을 거란과 송나라에 가서 설득했다. 또한 사령관으로서 여진 정벌과 별무반 창설을 주도함으로써 숙종의 군사적 기반을 닦았다. 윤관은 숙종뿐 아니라 아들 예종까지 보좌한 측근중의 측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