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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미귀환 한인' 자료 대거 발굴 / 국민대 한국근현대사연구팀(책임자 장석흥교수)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 03.04.30
  • 조회수 13164

2003년 4월 29일(화) - 중앙일보 -



"기성단체의 지도자는 자발적으로 물러나라. 만약 이들이 재신임되더라도 단연코 사퇴해야 한다."

이는 1945년 12월경 북경 지역에 머물고 있던 한국인 귀환과 관련,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인 대표자들이 쓴 결의문의 한 구절로 한인 지도부간의 알력과 갈등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국민대 한국근현대사연구팀(책임자 장석흥 교수)은 28일 이 자료와 함께 해방 후 중국 거주 한인의 귀환 문제를 총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국민당 관련 자료 2백여점을 발굴.공개했다. 이번 작업은 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 육성을 위한 지원의 일환으로 지난 해 8월부터 최근까지 이뤄진 것이다.

이번 자료 발굴은 지금까지 일제에 의한 수탈과 강제 연행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정작 해방 후 해외 한인의 귀환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연구가 없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본이 종전 후 자국민의 귀환문제를 끈질기게 추진해온 것에 비하면 우리 정부는 이 문제를 사실상 외면해왔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동북지역의 한인들의 거주 인원과 재산, 귀환 계획 및 추진 과정을 담은 '한인 귀송에 관한 자료'이다. 여기에는 원래 1만5천여명의 남한 출신 한인을 중국 심양에 집결시켜 인천과 부산항을 통해 귀환시키려 했으나 추위로 1946년 12월 2천5백여명만 귀환시키는 과정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아울러 귀환 세부지침인 '동북행원한교사무처제2차견송한교계획(東北行轅韓僑事務處第二次遣送韓僑計劃)'에는 1만명의 한인을 1947년 10월부터 집중적으로 귀환시키려는 방침이 담겨 있다.

이외에 1947년 모란강 주변의 한인들이 두만강 하류 도문(圖們)에 집결했으나 북한에서 입경을 허락하지 않아 귀국하지 못한 상황을 보여주는 '모란강회국조선인(牡丹江回國朝鮮人)'이라는 자료도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이번 조사에서는 일본에 대한 현지 답사를 통해 일본의 한인 귀환에 관한 추가 자료도 확보했다. 하카타(博多).시모노세키(下關) 외에도 우스노우라(臼浦).와카마츠(若松).센자키(仙崎) 등 10여 곳이 귀환을 위한 거점으로 이용됐음이 밝혀졌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싸워야했던가를 알려주는 사실들도 확인됐다.

대표적인 것이 기타규슈(北九州)시에 소재한 와카마츠 항이다. 시모노세키에 미군이 투하한 기뢰로 배가 뜰 수 없게 되자 몰려든 한인들은 인근에 위치한 와카마츠항으로 몰렸다. 임시막사(현재 산큐회사의 창고)에 수용됐던 한인들은 1945년 9월 소형 선박을 타고 귀국을 시도했으나 마쿠라자키 태풍으로 와카마츠 항 근처에서 조난을 당해 모두 죽고만다. 육지로 밀려 온 헤아릴 수 없는 시체들은 현지 주민에 의해 오다야마(小田山) 묘지에 매장된 채 수십년간 방치되었다. 최근 기타규슈시는 시민들의 요구에 맞춰 위령비를 세웠다.

일본 내 조사에서는 돗토리(鳥取)현 후생과는 작성한 '비일본인수송관계통첩철(非日本人輸送關係通牒綴)'과 당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발표 자료 등 1백여점을 공개해 의미를 더 했다. 이번 연구작업에는 한국사 전공자는 물론 동서양학 전공 학자 및 국제법 전공 연구자 등 총 35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이미 고령이 된 당시 귀환 생존자들을 통한 구술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만주.몽골.자바.해남도 등지로 조사 지역을 확대할 예정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한인 귀환을 연구해왔던 최영호(영산대) 교수는 "사실 한인의 귀환에 관한 연구가 뒷전에 밀린 것은 민족적 수치"라고 말하고,"이번에 발굴된 자료가 관련 분야 활동과 연구를 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wjsan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