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속의 음성은 저음이었지만 정중했다. 그는 작은 나뭇조각 으로 나무가 자란 지역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먼저 물었다 . 그리고 일본 교토(京都) 고류사(廣隆寺)의 미륵보살상(彌勒菩 薩像)을 만든 소나무 산지가 경북 울진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알고 싶어했다. 몇몇 지면에 ‘일본 국보1호인 교토 고류사의 미륵보살상은 재질이 좋은 춘양목(예:소광리 소나무)으로 제작되었 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던 한 산림학도의 국수주의적 태도가 마침내 옳은 비판자를 만났다는 생각이 일순 스쳤다. 쏟아질 비난 을 감수할 생각으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 그러나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질문 의도는 질책보다는 오히려 나 의 추정에 힘을 보태주는 듯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의 기쁨은 컸다. 한 산림학도의 주장을 풍문으로 전해듣고, 보다 타당한 과학적 근거를 확인하고자 동국대 문명대 교수가 전화를 주신 것이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문 교수 역시 1980년에 펴낸 ‘한국 조각사’(열화당)를 통해서 고류사의 미륵보살상은 우리 춘양목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이미 추정하고 있었다. ‘사람의 머리카락 한 가닥으로 고향을 추정할 수 없는 이치처럼 , 나뭇조각 일부로 그 나무의 산지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는 답변을 우선 드렸다. 그리고 다른 고장의 소나무보다는 조각재로 더 적합한 재질특성을 가진 양백지방(兩白地方)의 춘양목이 불상제작에 적합한 이유 때문에 춘양목으로 추정하게 되었으며, 양백지방 소나무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울진 소광리이 기 때문에 울진이라는 지명을 거명하게 됐다고 말씀드렸다. 이런 설명에 이어 나 자신 평소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여쭈었다. 국내외 미술사학자들은 어떤 근거로 미륵보살상을 신라에서 제 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지, 그리고 오늘날 일본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는 무엇인지. 그의 답변은 막힘이 없었다. 오히려 어설프게 알고 있던 나의 부족한 지식을 정정해 주기까지 했다. 그 인 연으로 나는 문 교수의 연구실에서 신라 제작설을 뒷받침할 수 있 는 꽤 많은 일본학자들의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고, 감히 이런 문화 국수주의적 시각의 글을 다시 쓸 수 있는 용기도 얻었다.
고류사의 미륵보살상은 소나무로 만든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일 컫는다. 우리 국보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꼭 빼닮은 이 불상을 일러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표징’이라고 상찬했다. 그리 고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은 ‘너그럽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지닌 성자의 사색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이 미륵반가사유상을 고류사 영보관(靈寶館)에서 직접 친견했을 때의 감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청동불상에서 느낄 수 있는 탄력감이나 석불만이 간직한 화강암 질감과는 달리 나뭇결(木理)이 내뿜는 아름다움은 각별했다. 보관(寶冠)에서 뺨으로, 그리고 몸통과 옷자락으로 흐르는 나뭇결은 최고의 안목을 지닌 장인의 솜씨로 법열(法悅)이 충만했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가슴 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우리 소나무에 대한 자존심으로 변했다.
일본 제일의 보물답게 이 불상의 제작 장소를 두고 오래 전부터 양국간에는 논란이 이어졌다. 이 땅에서 또는 일본에서 제작된 것인지를 밝히는 문제는 특히 일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한 나라의 제일 가는 보물이 제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서 제작 된 것임을 받아들이는 일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인 산림학자 코하라 지로오(小原二郞) 박사가 1951년 ‘불교 예술’13호에 발표한 논문 ‘상대조각의 재료사적 고찰(上代彫刻の材料史的考察)’을 통해 반가사유상의 재질이 ‘소나무나 곰솔의 특성을 지닌 것’임을 보고하면서 이 불상의 제작장소에 대한 논란은 시작되었다.
일본과 한국 제작설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본 제작설의 경우, 일본학자는 반가사유상과 함께 고류사에 보관돼 있던 또 다른 불상이 편백(일본 자생수종)으로 만들어진 일본 고유 양식의 불상이기에 비록 소나무로 제작되었을망정 반가사유상 역시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주장한다. 몇몇 한국 학자의 시??역시 재질과 제작 방법이 일본의 보통 양식과 다르다는 사실만 으로 신라의 것으로 볼 수 없고, 오히려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작품’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소나무는 한·일 양국에서 모 두 자생하고 있음을 그 근거로 든다.
한반도 제작설의 경우, 다수의 일본학자나 한국학자는 불상의 양 식이나 옛 기록에 근거하여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 치고 있다. 이런 추정의 근거는 일본 고유양식과 다른 고류사 목 조반가사유상의 특이한 제작 방식과 재료, 우리 국보83호 금동미 륵반가사유상과 고류사 반가사유상이 지닌 유사성에 특히 무게??두고 있다. 한편 한·일 양국의 학자들이 고류사 미륵불상의 제작처를 각기 달리 추정하는 배경에는 우리 국보83호의 출처에 대한 국내 학계의 논란도 한몫했다. 국보83호 반가사유상의 출처가 백제인가 신 라인가 하는 학자간의 논쟁은 1966년 경북 봉화에서 석조여래좌 상의 하반신부분이 발견된 이후 신라에서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 근거는 쉽게 옮길 수 없는 석조여래좌상의 형 태나 옷주름 처리 형식이 국보83호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도 신라 제작설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적 신념이나 소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고류사의 미륵불상만은 특이하게 소나무로 제작된 점, 소나무는 한·일 양국에서 모두 자생하는 점, 그리고 고류사의 미륵불상이 한국의 국보 제83호와 꼭 빼닮은 점 따위가 이 불상 제작처에 대한 추정의 실마리이자 논쟁의 중심에 있 음을 알 수 있다.
산림학도의 입장에서 고고학자나 미술사학자들의 전문 영역에 감 히 머리를 내?형편은 아니다. 그러나 국내의 학자는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의 학자까지도 신라에서 만들어진 불상이라는 추정이 보다 더 큰 신뢰를 얻고 있는 상황에서 이 땅의 소나무로 만든 것이라는 논리를 배제할 적당한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이 불상 제작에 사용된 우리 소나무의 산지에 관심이 모아졌 고, 그런 관심은 질 좋은 양백지방의 춘양목으로 목조미륵반가사 유상이 제작됐을 것이란 추정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물론 반가사 유상과 유사한 미륵상들이 양백지방에서 출토된 사실도 이런 추 정을 하는 데 참고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춘양목을 주장하는 나의 추정을 반박하는 글도 없지 않다. 한반도 제작설에는 귀를 닫고 일본쪽 논리에만 귀를 여는 듯해서 서운하지만 그 역시 학자적 소신이라 여기고 싶다. 그러나 추정은 추정일 뿐, 춘양목이 아니면 어떠랴. 이 땅에서 고류사의 목 조미륵불상이 제작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소나무가 누릴 자존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