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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한·중·일의 민족주의 열풍 / 이원덕(국제)교수

  • 작성자 한겨레
  • 작성일 04.01.28
  • 조회수 9555
새해 벽두부터 동북아 세 나라에서 때아닌 ‘역사’와 ‘영토’를 둘러싼 갈등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새해 첫날 야스쿠니 신사를 전격 참배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격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의 독도우표 발행 계획에 대해서 발행 정지를 요구하는가 하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재차 주장하여 한국 국민의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노골화되면서 한-중 간에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심각한 역사 마찰이 일어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난 15일에는 중-일 간 영유권 마찰을 빚고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어로는 댜오위다오)의 상륙을 시도하려던 중국 어선을 일본 해상자위대가 물대포로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에도 일본 단체 관광단의 집단매춘 사건, 일제시대 화학무기 폭발사고 등이 일어나 중국인들의 반일 정서가 후끈 달아오른 바 있었다. 중국은 현재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참배에 격노한 나머지 일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중-일 정상회담을 회피하고 있다.

이처럼 최근 들어 한·중·일 간에는 ‘역사’와 ‘영토’를 매개로 한 민족주의 갈등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말하자면 ‘기억’과 ‘아이덴티티’를 둘러싼 삼국지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전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다름 아닌 네티즌들이다. 삼국의 네티즌들은 역사나 영토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상대국의 해당 웹사이트를 무차별 공격하여 마비시키는 새로운 전투 양상을 연출하고 있다. 지금 동북아에 불고 있는 민족주의 열풍은 단지 국가권력에만 그치지 않는다. 곧, 국가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일부 역시 국익을 둘러싼 나라 간의 권력투쟁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시야를 넓혀서 보면 지금 세계는 근대 국민국가 체제를 초월하여 상호 의존과 협력에 기초한 광역국가 건설 혹은 지역공동체 수립에 몰두하고 있다. 유럽연합(EU), 북미자유무역지대(나프타), 아세안 등 지역 공동체 건설은 오늘날 세계사 흐름의 대세가 되고 있다. 또한 전 세계 국가들은 앞 다투어 자유무역협정(FTA)의 체결에 나섬으로써 시장개방이 놀랍게 진척되고 있으며 인적 교류 또한 급속도로 활성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동북아 지역에서는 이러한 세계문명의 도도한 흐름에 역행한 민족주의 갈등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중국의 민족주의 고조는 새로운 국민통합의 이데올로기로서 또 한편으로는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민족적 자긍심이 표출로서 대두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일본의 경우 장기불황의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면서 상실한 자존심을 회복시켜줄 강한 국가를 희구하는 국민의 사회심리가 내셔널리즘의 부상을 초래한 것으로 이해된다. 최근 들어 빈발하고 있는 이 지역의 민족주의의 돌출 현상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보기에는, 결국 장기적으로는 동북아지역도 개방과 지역통합이라는 세계적 차원의 흐름에 동참하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한·중·일 3국은 동북아 지역공동체 수립을 위해 노력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다만 이번 ‘역사전쟁’을 통해 동북아 3국이 상호협력과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길로 가는 데는 지극히 험난하고도 예측 불가능한 장애물들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동북아 지역공동체 구축을 실현해 나가는 데서 ‘역사’와 ‘영토’를 매개로 한 민족주의 열기의 분출이 필요 이상으로 확산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역사전쟁’으로 말미암아 환경, 경제, 안보 등 어렵게 쌓아 올린 여타 영역의 지역협력 성과마저 손상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북아 3국의 지식인들은 진정한 동북아 협력의 시대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동북아의 민족주의를 슬기롭고도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이원덕·국민대 국제학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