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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그림속의 얼짱·몸짱]<8·끝>왜 명화 속에 얼짱 몸짱이 많나 / 이명옥(미술)겸임교수

  • 작성자 동아
  • 작성일 04.02.23
  • 조회수 9842
2004년 02월 22일 (일) 17:44

왜 그림에는 얼짱 몸짱이 많을까. 특히 명작이 가득하다는 세계적인 미술관에 한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에로틱한 여자 누드 작품이 많은 것에 놀란다. 대체 예술가들은 왜 터놓고 여자를 밝히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전통적인 미술품의 제작자와 고객, 관람자 모두가 남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전통 서양회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6∼19세기는 남성 미술가, 남성 고객의 독무대였으며 예술가의 창작의도보다 남자 수집가의 입김이 창작에 결정적 작용을 하던 시대였다. 작품의 주제와 모델까지도 부유한 주문자가 직접 고른 경우가 많았고, 특히 여인 초상화는 고객의 취향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그림의 상품가치를 최대한 높여야 했던 화가들은 자연히 감상자의 구미에 맞는 아름다운 여성 모델을 눈요기 감으로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누드화의 주인공이 육체를 전시하듯 내 보이며 관객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도 오로지 가상의 애인인 수집가를 유혹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그림 속 미녀가 고객에게 꼬리를 치면 남자는 눈으로라도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 이른바 누드화의 기본공식이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캐롤 던컨도 ‘남자다움과 남성 우위’라는 논문(1973년)에서 그림 속 여성이 관람객에게 교태를 부리며 눈 맞춤을 하거나, 자는 척, 혹은 기절한 척 연출하는 데는 남성 감상자가 눈치 보지 말고 실컷 여체를 즐기며 쾌락을 맛보라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경향은 주문자의 입김보다 예술가의 자의식이 강조되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예술적 영감의 원천은 에로티시즘이며, 남자 화가의 강한 성욕이 미술을 창조한다는 남성 우월적 편견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편견에 대항하는 미술가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 여성 미술가 로라 나이트(1877∼1970)의 그림은 남성의 성적 대상물로 전락한 여성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처절히 고민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옷을 입은 여자 화가는 한 손에 붓을 든 채 자신의 나체 자화상 앞에 서서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 손에서 붓을 놓지 않은 것은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상징하지만 창작자인 동시에 모델이 되어버린 혼돈스런 상황은 화가에게 끝없는 딜레마를 제공할 뿐이다.

로라가 여성 화가의 나체화를 사회적 금기로 여기던 시대에 과감하게 누드 자화상을 제작한 것은 예술계의 왜곡된 여성관을 꼬집고 이처럼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로라의 선구적 노력은 이후 많은 후예들을 만들어 냈다. 여성이 남성의 성적 흥분을 위해 이용당하는 모욕적인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여성 화가들은 그동안 금기로 여겨졌던 벌거벗은 남자 모델을 그리거나, 여성 미술가 자신의 신체와 성기를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등 파격적인 방식으로 예술의 성차별을 고발했다.

하지만, 남성은 여성을 바라보며 즐기고, 여성은 지배당한다는 불평등한 성의 역학관계를 뒤엎기는 역부족이었다.

오늘날 광고, 영화,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를 보라. 남성은 훔쳐보는 자요, 여성은 남성의 굶주린 눈의 쾌락을 채워주는 사냥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칼럼을 통해 필자는 요즘 유행하는 ‘얼짱 몸짱’의 기원은 바로 미술이며 그것의 이면에는 여러 가지 사회 문화적 상징들이 숨어 있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결국, 완벽한 여성의 아름다움은 허상이며 환상임을 알리고 싶었다. 그동안 읽어 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국민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