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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화요포럼/자녀교육의 열정과 지혜 / 배규한 한국청소년개발원장(사회학과교수)

  • 작성자 매일신문
  • 작성일 04.11.17
  • 조회수 6060

[매일신문 2004-11-16 14:33]

내일은 대입수능 시험일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예보된 ‘입시한파’가 수많은 학부모들의 가슴을 졸이게 한다.

대학입시 때문에 전국의 관공서가 출근시간을 늦추고 비행기 이착륙 시간을 조절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아마 한국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학입시는 국가적으로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자녀가 수능시험을 잘 보도록 전국의 명산대찰이나 교회에서 철야기도 하는 모정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자녀교육을 위한 부모들의 열정은 입시철에 국한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녀교육을 위해서라면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희생하는 것이 한국의 부모들이다.

자정 넘은 시간 자녀를 태우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는 자동차 행렬이 있는가 하면, 과외비를 벌기위해 파출부로 나서는 어머니도 많다.

최근에는 고액과외, 불법유학 등으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바로 이러한 교육열이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 패러다임이 바뀌는 변동기를 맞이하여 자녀교육에 대한 한국 부모들의 열정이 더욱 뜨겁다.

급격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정보격차에 따른 질적 불평등을 극복해 줄 것은 교육 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모들의 생각은 옳다.

미래 정보사회에서 인적 자원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자녀교육에 대한 한국 부모들의 열정은 사회발전 차원에서도 존경할 만하다.

그런데 세상 바뀌었음은 잘 알면서 자녀교육의 방법도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자녀교육은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를 읽고 자녀를 올바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부모의 ‘지혜’가 추가돼야 한다.

자녀교육에 열정만 쏟는 부모들의 가장 큰 오해는 “오로지 학교교육만 중요하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오해는 아직도 산업사회의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일상생활이나 자기학습에 의한 학교 외 교육이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두 번째 오해는 “무엇보다 공부가 최우선”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공부만 잘 하여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형제간 우애나 예의범절, 자연보호, 남을 배려하는 마음 등은 좀 부족해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정보사회에서는 경쟁에 이기는 사람이 더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며 공생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더 풍요롭고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다.

세 번째 오해는 “공부하는 시간이 길수록 공부도 더 잘 한다”는 믿음이다.

자녀가 책상 앞에 또는 학원 강의실에 오래 앉아 있다고 해서 그 시간 모두 공부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디지털 시대의 창의력은 수없는 반복 학습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 자녀교육을 위한 부모의 지혜는 우선 위의 세 가지 오해에서 벗어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는 자연관찰을 통하여 생명의 신비를 깨닫거나 문화유적을 통해 선인들의 삶을 느끼게 해 주는 등의 감성을 길러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모형제는 물론 조상과의 관계나 친지, 친구 등과의 교류를 통하여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해하고 더불어 사는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

다원주의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태도를 길러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설계하며 개척해 나가는 자율성을 갖도록 해 주는 일이다.

자신의 존재론적 의미를 깨닫고 자기 삶의 기대수준과 미래에 대한 열망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해 준다면, 공부는 스스로 잘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지식이나 돈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한없는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집안일을 하거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또는 친지를 방문하거나 여행하는 가운데 자녀들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열정이 지나치면 지혜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자식에 대한 열정을 무분별하게 쏟아내기보다는 오히려 깊은 사랑으로 이를 억제하며, 자녀 스스로 자신을 계발해 가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지혜로운 부모의 모습일 것이다.

배규한(국민대 교수·한국청소년개발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