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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역사학회(회장 김두진 국사학과 교수) 광복 60년 심포지움

  • 작성자 한겨레
  • 작성일 05.08.26
  • 조회수 6086
‘민족을 넘어 평화로’ 전환점에 선 역사학의 역사

[한겨레 2005-08-25 15:27]



[한겨레] 커버스토리
흐르는 시간에 점을 찍어 이를 기리는 것은 오직 인간의 습성이다. 돌아보고 기억해 장차를 도모하는 계몽의 유산이다.

역사의 광막한 시간 한 가운데를 ‘광복 60돌’이라며 굳이 붙들어매는 일의 고갱이는 그래서 ‘성찰’에 있다.

역사학계가 요즘 그 성찰에 골몰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손가락을 들어 과거를 가리키던 역사학자들이 그 손가락을 자신에게로 돌린 것이다. 한국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회(회장 김두진 국민대 교수)가 지난 17일부터 이틀간 경기도 포천군 광림세미나하우스에서 ‘광복 60년 한국 역사학의 성과와 과제’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연 것이 대표적이다.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은 최근 광복 이후 한국 역사학계의 성과와 변동을 분야별로 집대성한 <한국사 연구 50년>(혜안)이라는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한국 역사학의 성과를 되짚는 자리는 광복 50주년을 기념한 1995년에도 있었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2005년의 ‘성찰’은 심상찮다. 한국 역사학의 ‘역사’에 거대한 전환점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리는 긴장감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 긴장감은 근대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려는 역사학계의 노력이 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데에도 원인이 있다.

고대사, 조선사, 동양사, 서양사 등 각 분과별로 준비된 역사학회 심포지엄의 발표논문들은 한결같이 ‘뒤틀린 근대의 역설’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한국 역사학을 낳았고, 군사정권이 한국 역사학의 발전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그 과거를 극복해야 한국 역사학의 미래가 개척되는 역설이다.

당장 우리에겐 익숙한 한국사·동양사·서양사 등의 구분부터 일제 시기 역사학의 잔재다. 동시에 이 구분은 한국 역사학계의 한계를 상징한다.

”瓦되?서강대 교수는 자유민권사상의 전파를 우려해 서양사를 철저하게 배격한 일본 역사학의 한계가 광복 직후 한국 서양사학계의 척박한 연구인력으로 고스란히 옮겨졌음을 지적했다. 이성규 서울대 교수도 중국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동양사 편제가 한국 동양사학계의 연구대상을 좁히는 결과를 불러왔다고 분석했다. 더 큰 문제는 한국 근대 역사학의 체계가 처음부터 국사-동양사-서양사의 틀로 굳어지면서, 국경을 넘어선 역사 인식 구성에 애를 먹고 있다는 점에 있다.

튀틀린 근대의 역설

한국 역사학계의 방법론이 랑케의 문헌실증주의 및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삼았던 것도 일본 역사학의 영향이다. 1930년대 일본 역사학계는 랑케와 마르크스에 ‘매혹당한’ 상태였다. 이 시기 일본에서 공부한 한국 역사학자 1세대들이 광복 이후 각 대학에 자리잡아 후학을 기른 것이 한국 역사학 60년에 걸친 양대 흐름으로 굳어졌다. 더 큰 문제는 역시 따로 있는데, 한국 역사학은 랑케와 마르크스를 넘어선 역사학 방법론을 아직까지 온전히 체득·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서구 역사학 방법론은 그나마도 일본을 거치면서 ‘왜곡’된 형태로 도입됐다. 이성규 서울대 교수는 ‘일본의 마르크스 사관’을 예로 들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실천이 유보 또는 면제된 관념적 이상”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실천성이 거세된 ‘일본형’ 마르크스 사관의 수입은 한국 역사학계가 한동안 ‘관념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사관은 한국 역사학 발전의 가장 직접적인 ‘자극제’이기도 했다. 일제의 역사연구 성과는 한국 역사학자들의 ‘반면 교사’이자 ‘선행 지표’였던 것이다.

일제는 제국대학에 역사학과를 설치한 19세기 말, 임나일본부 등 고대 한·일 관계사를 집중 연구해 조선침략의 정당화 논리를 개발했다. 일단 조선강점에 성공한 뒤에는 당쟁론·정체성론 등 조선시대사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식민통치의 이론적 근거를 다졌다.

한국의 역사연구자들은 이런 일본 연구를 따라잡아 뒤집는 방식으로 식민사관을 극복했다.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를 닦은 박은식·신채호, 경제사학자인 백남운 등 일제 시기 한국 역사학 선구자들이 고대사 연구에 공을 들인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중국 또는 일본에 종속된 것으로 묘사된 한반도 고대사의 ‘독자성’을 밝힌 이들의 연구는 19세기 말 일본의 고대사 연구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인 동시에, ‘조선독립’의 분명한 근거였다.

일본의 조선사 연구를 따라잡는 일은 광복 이후에 이뤄졌다. 50-60년대의 거의 모든 역사학자들이 이 일에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기백 교수가 1961년 펴낸 <국사신론>이 대표적인데, 이 저술은 식민사학에 대한 본격적 비판으로 평가된다. 고대사부터 조선사까지 아우르는 통사를 서술하며 독립적 역사의 일관된 흐름을 잡아낸 것이다. 이같은 성과는 60년대에 이르러 한국 사학계의 식민사학 비판이 안정적 궤도에 올랐음을 방증한다.

식민사관 비판과 내재적 발전론

조선 후기 사회가 스스로 자본주의 근대국가로 변모할 씨앗을 품고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사학 극복의 노력이 가 닿은 하나의 종착지였다. 정형지 오산대 교수는 “조선 시대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과정은 해방 50년 역사의 발자취 그 자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조선사 연구가 광복 이후 한국 역사학계에서 핵심 관건이었다는 지적이다. 일제 식민사학이 고대사와 조선사를 헤집어놓은 자리를 정돈하고 되돌려야 한다는 ‘강박’이 한국 역사학자들을 쉼없는 정진으로 등떠민 동력이기도 했던 셈이다.

일본 역사학과 한국 역사학의 ‘역설적 동거’는 198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경제사학자인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은 일본 오쓰카 학파의 비교경제사학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를 비판하며 식민지근대화론을 제기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도 일본 경제사학자 나카무라 사토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한국 역사학은 일본 역사학과 ‘이중적’으로 동거했다”는 차하순 서강대 명예교수의 지적은 이런 복잡하고도 중층적인 한·일 역사학의 관계를 드러낸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식민사학 극복의 주역이었던 민족주의 사학은 군사독재 정권의 ‘국가적 돌봄’ 아래 놓여 있었다.

최덕수 고려대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이후 어떻게 국사 연구 및 교육을 강화했는지를 설명했다. 중고등학생들은 정부가 펴낸 국사 교과서로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일단 대학생이 되면 교양국사과목을 반드시 수강해야 하며, 대학원에서 (동양사·서양사가 아닌) ‘한국사’를 공부할 경우 특별히 전공장학금을 지원받고, 학위 취득 뒤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안정적 연구생활을 하는 등의 ‘국사 시스템’이 바로 이때 완성됐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편찬작업도 1973년부터 시작됐다. 국가가 식민사관 극복을 통한 국사의 복원에 직접 나선 것이다.

 김영미 이화여대 교수는 한 통계를 통해 그 결과를 보여준다. 2003년 현재 한국학술진흥재단에 등록된 한국사 연구자를 보면, 40대 연구자가 30대 및 50대 연구자에 비해 두 배 이상 많다. 현재의 40대 연구자는 그 대부분이 70년대에 역사학 공부를 시작한 세대다. 김 교수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국학 연구를 고취한 결과, 1980년대 이후 한국사 연구자 수가 크게 늘고, 그 연구성과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지적한다.

 ‘뒤틀린 근대의 역설’은 여기서 한번 더 한국 역사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군사정부의 지원을 받은 국사학계를 중심으로 소장 역사학자들이 대거 배출되면서, ‘국가주의 사학’ 대신 ‘저항적 민족주의 사학’의 지평이 열린 것이다. 1975년 강만길 고려대 교수가 전국 역사학 대회에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래, 남과 북을 하나의 역사인식 체계에 묶어 일본과 미국 등의 외세를 경계하려는 민족주의 사학은 한국 역사학 주류의 자리에 오르기 시작했다.

지역 전체로 인식지평 넓히자

이런 흐름은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1979년 출판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본격적인 근현대사 연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80년대 들어 ‘한국역사연구회’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집단을 형성한 소장학자들은 ‘민중사학’을 통해 역사학계 전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일제시기 사회주의운동사 및 해방 정국을 포함한 근현대사 연구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숨가쁘게 달려온 한국 역사학계는 지금 또 한번의 역설에 직면해 있다.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작업의 결과, “한국사 연구자들은 진보·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내재적 발전론과 민족사학론이라는 시각을 공유”(박찬승 한양대 교수)하게 됐지만, 역사학계의 이런 ‘주류적 시각’이 거대한 도그마가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광복 60돌을 맞는 한국 역사학계가 맞닥뜨린 비판은 크게 보아 서양사학계의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과 사회경제사학계의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나뉜다. 이들은 주로 민족주의 사학이 ‘민족’ 또는 ‘근대’라는 틀에 갇혀 역사적 사실을 오히려 뒤틀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민족사학 진영에서는 한반도의 구체적 현실에 뿌리내리고 민족과 근대의 문제를 오히려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정형지 오산대 교수는 이런 논쟁에 대해 “근본적으로는 현실과 역사연구의 목표에 대한 인식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만큼 서로 적대적일 정도로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재진행형’인 이들의 논쟁에 해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임지현 한양대 교수, 안병직 서울대 교수(서양사) 등이 제기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나,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이영훈 서울대 교수 등이 던진 식민지근대화론의 화두는 모두 탈근대 혹은 탈민족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은 민족주의 사학자 집단 내부에서 동아시아사에 대한 관심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 구분과 국경을 넘어 지역 전체를 역사의 시각에 놓는 새로운 역사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무르익고 있는 셈이다.

 김영한 서강대 교수는 “국가사를 넘어서는 지역사와 세계사”를 대안적 역사연구의 관점으로 제시한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민족주의 사학과 탈근대 역사학이 공존할 틈이 발생한다. 광복 60돌, 한국 역사학은 이제 민족을 넘어 평화의 지평으로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