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의 결과로 한일합방은 그저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고종의 대한제국은 일본의 희생물이기 전에 한국이 극복했어야할 ‘구체제’(ancien r´egime)는 아니었을까,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조약은 내용에 앞서 절차적 문제점은 없을까.
을사늑약 체결 100주년을 맞아 ‘을사조약과 20세기 초의 한반도’를 공동주제로 27, 28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국민대에서 열리는 제48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는 기존의 시각에서 탈피한 다양한 논문이 발표된다.
▽한일합방 과정에서 러시아의 역할=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는 ‘러-일전쟁과 국제관계’라는 논문에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 영국과 미국의 일본 지원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지만, 1910년 한일합방에는 오히려 러시아의 태도 변화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일제의 한반도 병합은 ‘열강이 이미 분할하고 남은 지구상의 최후 공간’ 만주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한국학계에서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며 만주를 중심으로 당시 한반도 주변 국제정세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러-일전쟁 발발 전 러시아가 1901년 일본에 제의한 ‘한국중립안’과 일본이 이에 맞서 제시한 ‘만한(滿韓)불가분 일체론’은 이미 한반도의 운명이 만주에 대한 이해관계와 직결됐음을 보여준다는 것.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지지한 것도 1900년 러시아의 만주 점령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다시 만주의 문호 폐쇄를 기도하자 미국과 영국의 거센 견제가 작동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일본이 한반도 병합에 나설 수 있는 돌파구는 러시아에 의해 마련됐다는 것이 최 교수의 분석이다.
러시아가 아시아에서 발칸으로 진출 방향을 선회하면서 1907년 러-일협약을 체결했고 이에 따라 영-불-러 3국 협상에 일본이 가담하는 실질적 4국동맹이 이뤄져 한일합방의 외교적 토대가 마련됐다는 설명이다. 반면 미국은 1908년 ‘만주제철도중립화안’을 제기하며 러시아와 제휴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으나, 러시아는 일본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 1910년 2차 러-일협약을 체결했고 이로 인해 한일합방의 길이 열리게 됐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극복 대상?”=경제사학자인 김재호 전남대 교수는 ‘을사조약 이후 식민지화 과정과 구체제’라는 논문에서 대한제국은 식민지화로 좌절된 근대적 돌파구라기보다는 근대화를 위해 극복했어야할 장애물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제국은 황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노골적 매관매직으로 관료사회의 부패와 문란을 낳았으며, 황실로부터 특권을 받은 회사들도 군소상인을 수탈하는 독점기업이었고, 은행과 전신·철도사업 등에 대한 황실의 투자액도 미미했다는 점에서 서구 근대화과정에서 상정된 ‘구체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