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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알면 the 이로운 역사] ⑯이회영,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외치다 / 장석흥(한국역사학과) 교수

  • 작성자 김해선
  • 작성일 20.03.23
  • 조회수 1418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했다. 당사자는 물론 부모 형제 자식까지 갖은 고초와 수난을 겪어야 했기에 나온 말이다. 그만큼 독립운동은 집안의 희생을 감수하고 나서야만 했던 험난한 길이었다. 그런데 가문 차원으로 독립운동을 벌인 경우가 있으니,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일가가 대표적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우당의 6형제들은 만 여석의 전 재산을 처분하고 50여 명의 가솔을 이끌고 만주 서간도로 망명했다. 그리고 경학사(耕學社)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해외 독립군 기지를 개척했다. 잘 알려지듯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 양성의 근간으로  독립전쟁의 초석이 됐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의 집안은 내로라하는 삼한갑족의 명문이었다. 명가의 전통은 누대로 이어지며, 아버지 이유승(李裕承)은 판서와 우찬성·궁내부특진관 등을 두루 지냈다. 둘째 형 이석영의 양부 이유원(李裕元)은 영의정을 지낸 정치적 거물이었다. 그래서 우당의 독립운동을 두고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 oblige)의 전형으로 꼽는다. 그러나 ‘상류층 내지 귀족층의 엄격한 의무’를 뜻하는 서양식의 개념인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혁명가인 우당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조선 명문가의 후예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배층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당 이희영의 모습./사진=장석흥 교수

우당의 독립운동은 젊은 시절 불평등한 사회를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망한 혁명적 의식에서 비롯했다. 그는 집안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노비를 자유민으로 풀어주고, 다른 집의 노비에게도 높임말을 쓸 정도로 자유·평등사상에 투철했다.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개가시키며 구태한 풍습을 타파하는데 앞장선 우당의 꿈과 화두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었다.   

그는 10대 후반 벗들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알기 위해 신문명과 신학문을 받아들였다. 이때의 동지들은 동생 이시영과 이상설, 이동녕 등이었다. 이들은 1년 가까이 서울 근교의 신흥사 등에서 합숙하며 전통 학문은 물론 서양의 역사를 비롯해 정치·경제·법률, 영어·수학·물리·화학·식물학 등을 익혔다. 이 무렵 이들이 섭렵한 서적은 수천 권에 달했다. 그러면서 우당의 지식과 식견은 세상을 경략할 수준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제 제왕의 시대는 갔고 사민 자유평등의 시대가 왔으니, 우리의 전통과 습성을 생각하면서 시대 조류에 따라 새나라 건설 이론을 확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벼슬길을 마다했다. “벼슬길에 나가서 목숨을 바쳐 시국을 바로 잡고 이도(吏道)를 세울 자신이 있다면 몰라도, 그런 자신이 없다면 벼슬을 물러나 널리 온 세계에서 지식을 구하고 동지를 모아,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고 도탄에 빠진 인생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1904년 기독교에 입교한 우당은 상동교회에 부설 상동청년학원을 세워 청년 교육에 힘을 쏟았다. 1908년에는 이은숙 여사와 상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려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교회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옳다고 믿으면 끝내 결행하는 면모가 우당의 진실이었다.        

스러지는 민족의 운명 앞에서 그의 화두는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으로 옮겨갔다. 구시대 타파를 위한 혁명적 의지가 독립운동으로 표출된 것이다. 청년시절 품었던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굳은 신념은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1914년 미주의『국민보』에 실린「한국은 어떠한 인물을 요구하는가?」에서, 그는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되 국민이 합동하여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다”고 하면서 우리 민족이 요구하는 인물은 나폴레옹이나 제갈공명같은 영웅이나 대군략가가 아니라 개인의 천직을 대하는 자, 사회에 책임을 행하는 자, 국가에 의무를 다하는 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수립할 독립국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20년 무렵 우당의 베이징 집은 독립운동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길게는 몇 달씩 머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찾는 이가 많게는 30~40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 생활이 곤궁해져 끼니를 잇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넉넉한 품으로 포용한 우당이었다. 독립운동의 거두들은 물론 젊은 청년들의 출입도 잦았다. ‘상록수’의 심훈도 한 달이나 머물렀고, 젊은 아나키스트 유자명·이을규·이정규, 공산주의자 홍남표·성주식 등도 찾아와 머물렀다. 우당의 집은 이념이나 노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열려 있었다. 50대 우당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해 20~30대 청년들과도 격의 없는 교류를 나눴다. 

우당 이희형과 형제들의 모습./사진=장석흥 교수

우당이 아나키즘 노선을 표방한 것은 1920년 베이징에서였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 ‘사상적 전환’이라 일컬을 때, 그는 “나는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가 되었다거나 또는 전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나의 생각과 방책이 현대의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서로 통하니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본래 다른 사상을 지녔던 내가 새로이 그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혔다. 인간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과 독재를 배척하고, 인류평화를 짓밟는 제국주의를 타도하려는 아나키즘과 자신의 혁명사상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나는 본래 벼슬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며 불평등한 신분제도도 본래 반대하던 사람이다. 독립을 하자는 것도 나 개인의 영화를 위한 욕심에서가 아니라 전체 민족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알맞은 제도와 조직의 구조를 생각해야 했고, 그 결과 얻어진 결론이 이것이니, 나의 이 사상은 일관된 것이며 나의 독립운동의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이 무정부주의와 공통된다 하여 나에게 사상적 전환을 했다는 의견에는 수긍할 수 없다. 나는 사심 없이 공정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와 같은 주장을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우당의 정치사상은 권력이 지배하지 않는 세상,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사민이 평등하고 만인이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는 획일을 강요하는 공산주의의 독재를 경계하고 반대했다. 서구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답습 모방하는 것도 반대했다. 서구의 제도로는 자유․평등의 사회를 실현시킬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우당의 자유·평등사상은 세계 사조를 아우르면서도 민족의 전통과 문화에 적절히 적용했던 점에서 창의적이고 독특했다. 그것이 서구의 아나키즘과 다른 특징이기도 했다. 때문에 독립운동의 사상과 이념이 될 수 있었고, 진정한 평화사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100년 전 우당이 꿈꾸던 자유와 평등의 세계를 가슴 깊게 새겨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자세일 것이다.  

원문보기: http://www.eroun.net/news/articleView.html?idxno=1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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