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으로 촉발된 연정론이 소강 상태를 보이고 있다.
국회의 윤광웅 국방부 장관 해임 건의안 표결에서 우리당과 찰떡 공조를 보였던 민노당이 연정에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민노당은 최근 “대통령과 여권이 제기하는 연정론은 개혁국회와 민생정착의 실패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판 흔들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검토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당론을 확정했다. 이에 여권은 선거구제 개편을 고리로 연정 불씨 살리기에 나섰다. 선거구제 개편의 핵심에는 지역주의 극복을 명분으로 한 독일식 권역별 정당명부제 도입이 자리잡고 있다. 연정을 위해서는 현재의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정책정당 체제로 바꾸기 위한 선거제도 개편이 필수적이고, 독일식 선거제도가 지역구도 타파에 가장 적합하다는 논리이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에게 한 표, 정당에게도 한 표를 찍는 1인2투표식 전국별 정당명부제가 채택됐다. 만약, 독일식 권역별 정당명부제가 채택되었다면 과연 지역주의는 극복될 수 있었겠는가? 17대 총선 결과를 독일식 권역별 정당명부제로 시뮬레이션 해본 결과, 지역주의 극복 효과는 기대만큼 크지 않았다.
우리당은 총153석 중 24석을 비례대표 의석으로 배당받지만, 절대 취약 지역인 영남에서 22석, 강원에서 2석을 얻는다. 영남·강원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한 명의 비례대표 의석을 갖지 못한다. 한편, 한나라당은 총 128석 중 28석을 비례대표 의석으로 배당받지만 호남지역 비례대표 의석으로 오로지 1석만이 배당된다. 결과적으로 호남지역에서는 비례구와 지역구 의석을 모두 합쳐도 단 1석만을 얻게 된다. 민주당은 총 22석 중 비례대표 의석으로 17석을 배당받지만 영남 지역에서는 1석, 충청지역에서는 단 1석도 얻지 못한다. 민노당은 총 41석을 배당받고 39석의 비례대표 의석이 수도권 20석, 강원 1석, 충청 3석, 호남 4석, 영남 10석, 제주 1석 등 전 지역에서 골고루 분포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시뮬레이션 결과가 갖는 정치적 함의는 명확하다. 선거제도 개편이 만병통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와 같이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얻는 득표율이 극도로 미미할 경우에는 어떠한 선거구제 개편도 지역주의 극복을 담보하지 못한다. 또한, 선거제도 개편의 효과를 독점적으로 향유할 가능성이 큰 정당들이 연정을 매개로 선거구제 개편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되면 개편의 순수성은 의심받고 정략적이라는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선거구제 개편과 같이 정치권이 이해 당사자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중립적인 기관에서 이를 주도해야 한다. 스웨덴의 정치개혁 위원회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원내의석을 갖고 있는 정당은 1명의 대표만을 파견하고 위원회의 다수는 중립적인 전문 인사로 구성되며 개혁안의 모든 정치적 효과는 과학적으로 검증된다. 더구나, 위원회가 최종 채택한 안은 의회가 원안대로 가결하는 방식이다. 대통령이 선거제도 개편, 연정, 개헌 등의 논의에 중심이 되면 필연적으로 정치개혁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음모론만이 부각된다. 대통령이 진정 한국정치를 정상화시키려는 순수한 의도를 갖고 있다면 정치의 한 복판에 서기보다는 개혁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본인은 행정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정치 정상화의 핵심은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과도하게 정치에 나서는 것을 지양하고 의원의 자율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국회가 정치의 중심으로 거듭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