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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책과 디자인|조선 아르누보의 표정들 조현신(스마트경험디자인학과)

  • 작성자 박윤진
  • 작성일 20.04.21
  • 조회수 1504


한국근대 출판물의 표지에는 석판인쇄 초기기술의 원색적인 색감을 타고 다양한 표상이 등장하는데, 이 중 ‘조선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장식적이며 화려한 일련의 표지 군이 있다. 아르누보 양식이란, 19세기 후반 서구에서 만연했던 네오고딕, 네오바로크 등의 역사적 절충주의를 부정하고 탄생된 디자인 사조로 신흥 부르주아들의 각광을 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양식이다. 가우디, 알폰스 무하, 구스타프 클림트, 매킨토시 등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자연을 참고 자료로 삼아 구불구불한 나무 넝쿨과 유연한 선을 주조로 꽃, 백조, 공작, 청년과 처녀, 각국의 신화적 모티브, 태양 등을 장식적으로 사용했다.

     

            최남선이 지은 창가집 『경부철도가』(1908)                      이해조의 신소설 『자유종』(1910)

낯선 서구적 색감과 형상들

   

  이정환이 짓고 발행한『가정간독』(1912)  조선후기 소설 『옥중금낭』(1913)           『천리경』(1912)

조선에서 장식문양은 시전지를 비롯해 민화, 혁필화, 자수, 지공예, 편액, 가구, 의복 등에서 다양하게 사용됐다. 새로운 인쇄 기술로 만들어진 근대 도서들은 이런 낯익은 전통적 장식의 세계에 낯선 서구적 색채와 형상을 불러오면서 조선인에게 근대적 시감각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최남선이 경부선을 타고 가면서 본 풍경을 노래한 창가집 『경부철도가』(신문관, 1908)에는 서양의 악기를 대변하는 하프, 일본의 도안집에서 온 듯 딱 떨어지는 꽃과 줄기 문양 속에 태극이 병치되어 있다. 이해조의 토론 신소설 『자유종』(광학서포, 1910)은 사면을 괘선으로 두른 후 전통 문양인 귀면을 축으로 종의 전면을 태극, 오얏꽃, 무궁화로 가득 채웠다. 이들은 장식을 쓰더라도 민족 저항의 함의가 드러나는 기호를 썼다는 점에서 서양의 아르누보 양상과는 대비된다.

합방 후에는 이런 상징의 사용마저 자유롭지 못한 현실 속에서 격한 시대상을 나타내듯 짙은 색감과 형태가 넘쳐흐르는 신파적 장식성이 대두됐다. 근대 문체를 가르쳐주는 『가정간독』(회동서관, 1912)의 표지는 조선의 장식 문양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흰색의 비둘기를 짙은 청색 바탕에 노란색 꽃과 병치했다. 고소설인 『옥중금낭』(신구서림, 1913) 역시 도안화된 꽃문양으로 전면을 장식했다. 전혀 다른 문양과 파스텔톤으로 등장한 이 표지들은 민화나 혁필화의 시각성과는 다른 감각을 환기하면서 근대성을 화사하게 전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천리경』(조선서관, 1912)이나 『현미경』, 『비행선』의 표지는 화려한 꽃장식 중앙에 제목의 기기를 세밀화로 넣어 새로운 과학문명에 대한 찬사를 보여주며, 『천리경』 표지 상단의 벚꽃과 상응하여 하단에는 모란이 사용된 점에서 끊임없이 전통적 기표를 혼용하는 태도 또한 볼 수 있다.

 이야기와 장식의 결합


  『이순신실기』(1925)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     『유몽기담』(1928)    조선 최초의 번역 시집『오뇌의 무도(1921)』                           『장한몽』(1929)

                                                                  

1920년대 들어 색채는 더욱 원색적으로 화려해진다. 『이순신실기』(박문서관, 1925)는 노랑 바탕에 빨강, 초록색의 화려한 꽃 액자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기념하고 있다. 또한 실제 인물인 평양기생 강명화와 거부의 외아들과의 비극적 정사를 그린 이해조의 신소설 『강명화전』(회동서관, 1925) 표지 역시 노랑 바탕에 강명화의 사진이 자잘한 꽃으로 화환처럼 싸여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만을 지닌 꽃문양과 원색의 강한 색채를 통해 민족영웅 혹은 팜므파탈의 삶을 기억하는 시각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소설 『금색야차』를 번안한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 『장한몽』(회동서관, 1929) 표지에서는 대동강변에 서 있는 주인공들의 뒷모습이 길상무늬의 둥근 액자에 담기고, 그 주위를 붉은색 모란이 에워싸고 있다. 아이들의 판타지 이야기를 담은 ‘쏟아지는 깨송이’ 『유몽기담』(조선야소교서회, 1928)에도 역시 휘감기는 넝쿨들 사이에 짙은 색 꽃이 배치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의미 있는 표상이나 장면을 제시하고, 그것을 꽃이나 패턴으로 장식하는 기법은 아르누보 양식의 전반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문고본 <조선문고>, 〈박문문고〉, <연학문고>                                         이서구의 소설집 『참패자』(1923)>                                                                                                  

김억의 조선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광익서관, 1921) 표지를 보자. 오선지 위에 구부러진 줄기의 꽃송이가 앉혀지고, 하단부에도

 역시 양귀비들이 취한 듯 피어오르고 있다. 작가이자 화가인 김찬영의 작품으로 그는 서문에 “죄악과 선미(善美)는 화의(和意)하여라/ 양귀비 아편의 빼어난 향기는/ 망각의 리듬 위에서 춤춘다”라는 탐미적인 디자인 변을 썼다. 이광수에게서 “유미주의를 지나 악마주의적 작가”라는 평을 들을 만한 데카당스한 디자인변이기도 하다. 이런 과도한 장식의 와중에서 정제된 활자체의 상징성 짙은 표지도 등장한다. ‘홍도야 울지 마라’의 작사자인 이서구의 소설집 『참패자』(경성서관, 1923)의 표지에서는 깨끗하게 다듬어진 선으로 그려진 가시덩굴, 그에 감싸인 심장에서는 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묘사 방식은 절제된 단순함을 보이지만, 그 기의에서는 여전히 원색적인 파토스와 정념이 넘치고 있다.

담백함과 절제된 장식성

   

        허준의 소설집 『잔등』(1946)           이태준의 소설집 『달밤』(1934)       오장환이 디자인한 『헌사』(1939)

​이와 같이 짙은 색채와 과도한 장식성의 대응 지점에 김용준의 디자인이 있다. 『달밤』(한성도서 주식회사, 1934)의 경우 밋밋한 흰빛의 창호문에 배꽃 형상을 톤이 떨어진 노란색으로 표현했다. 소설 주인공의 순박하고도 어눌한 성격이 희미한 달밤에 창호에 비치는 꽃과도 대비되는 듯하고, 단아한 제호 역시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잔등』(을유문화사, 1946)의 쥘부채 프레임은 『옥중금낭』에서의 깎아놓은 듯한 기하학적 표현을 수묵화의 부드러운 기운으로 바꾼 형상이다. 하단에 배치된 꽃 패턴은 구상적 정물화와 도안적 약화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수묵화이면서도 고답적이지 않은 장식성을 보여준다. ‘남아 있는 불꽃’, 즉 잔등의 모양으로 획을 마무리한 제목 역시 한자 타이포그래피의 정제된 미감을 발산한다. 이 외에 그의 『조선문학정화』, 『이심』, 『문학의 논리』의 디자인에서도 역시 이 같은 절제된 장식성, 전통적 풍취, 담백한 바탕색과 여백 등의 변주가 나타난다. 이는 “일부러 왜색 짙은 동시대 표지를 안 보려고 노력했다”는 그의 디자인관의 표출이자 조선 아르누보적 완결성을 시도한 요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 김동인이 일본에서 창간한 문학동인지 『창조』(1919)를 필두로 궤선만을 통해 장식성을 보여준 문고판 아르누보의 세계가 있다. 카프계열의 <조선문고>는 강한 보릿단, 〈박문문고〉는 청록파의 시세계와 같은 몽상적 사슴과 포도넝쿨, 해방 후의 <연학문고>는 무궁화 문양의 반복적 제시로 출판사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또한 당대에 호화로운 장정으로 추앙된 오장환 디자인의 『헌사』(남만서고, 1939)는 기의 없이 단지 망막적 기쁨만을 부여한 표지의 전형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조선 아르누보 양식은 출판계에서는 을유문화사와 정음사의 전문 북 디자인 기획으로 좀 더 정제되어가는 한편, 잔존한 딱지본과 숱한 상표들, 영화포스터에서는 전통성과 서구성의 혼합이 더 강화되면서 분방한 느낌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조현신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 표현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글항아리, 2018)를 출간했다.

 

 

원문보기: https://blog.naver.com/todayslibrary/221883722134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