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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각은…] FTA·노사문제 피해의식 버리자 / 이일환 (영어영문) 교수
[중앙일보]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은 예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도 가입해 있고,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향해 달리는 중이다. 수출입 규모로 본다면 세계 12위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 의식의 밑바닥에 흐르는 흐름의 어떤 부분은 여전히 예전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 이래 우리는 중국 대륙의 한족 내지는 비(非)한족의 침략을 수시로 받아 왔다. 근대에 들어선 일본의 식민지로 있기도 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미국의 보호와 원조 아래 나라를 키우기는 하였지만, 미국에 상당 부분 종속된 면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우리에게는 피해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국익에 득이 되느냐, 실이 되느냐 하는 찬반양론은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에 예속 또는 종속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는 것은 우리가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 의식의 일부분인 피해의식을 앞세우는 것이다. 협상이란 얻는 것도 있고 주는 것도 있는 것이지 어느 한편이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일방적으로 강대국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강요받던 시절의 우리가 아니다. 스스로 당당하게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으며 지내는 것이 이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다. 우리 자본이 해외에 투입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가 남한테 당하기만 하고 살았다는 생각은 이제 접을 때가 됐다. 우리는 그렇게 강한 나라도 아니고 그렇게 약한 나라도 아니지만,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역량을 그동안 충분히 쌓아 왔다. 우리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다른 나라들과 잘 상생(相生)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던져진 진정한 문제다.
노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1960~70년대의 시대가 아니다. 그때는 솔직히 고용주가 고용인을 부려먹으면서 자기 주머니를 채우던, 소위 착취가 가능했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 뒤 이런 현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고용인의 의식화가 시작됐고, 고용주는 자기 잇속만 챙기는 때려죽일 놈이 되었고, 고용인은 착취를 당하는 약자로 개념화됐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고용인을 자기 주머니를 불리기 위한 착취 대상으로 보는 고용주는 없다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그 점에서는 앞서 말했던 의식화가 한 몫을 했다. 그러나 고용인 가운데는 아직도 자신들을 착취당하는 노동자로 보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도 서로 합리적으로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피해의식을 앞세울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스스로 당당하게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합리적인 협상 자세가 중요하다. 국가 간에도 그렇듯이 노사 간에도 서로 상생의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기본적으로 다 함께하고자 하는 공동체적인 의식이 깔려 있다. 마을에 무슨 일 하나만 있어도 온 동네가 잔치하는 반면 이웃사촌이 땅 한 뼘만 사도 배 아픈 것이 우리 민족이다. 우리의 이 속성에는 좋은 면(신명 내기, 축구 응원)과 나쁜 면(덩달아 오르는 집값, 유행병)이 공존하지만 이 속성을 좋은 쪽으로 잘 살리면 이 시대에 상생의 정신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현명한 자세와 판단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일환 국민대 문창대학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