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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올림픽 성화대 프로메테우스 자손들의 스펙터클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작성자 박윤진
  • 작성일 20.11.16
  • 조회수 234

우리 일상의 주변에서 진짜 불꽃을 볼 수 있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다. 프랑스의 몽상적 과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개념과 이성에 반대되는, 몽상을 요구하는 대표적인 사유대상”으로 설정한 불, 신비한 모양새로 타오르는 그들은 이제 망각의 존재가 되어버린 채 단지 소확행 낭만의 캠프 파이어, 담배 라이터, 촛불 등의 왜소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심의 화재, 대형 산불, 산재 현장, 전쟁, 소각의 이미지로만 다가온다. 이 불꽃이 전 인류에게 평화와 희망을 주는 경우는 아마도 올림픽에서 뿐이 아닐까. 그런 까닭일까. 프로메테우스의 자손인 인류는 이성의 대극점인 몸의 전장에서 이 불을 성화라 부르면서, 최대 스펙터클을 기획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대

 

100년간 지속된 술잔 형상의 성화대
현대 올림픽에서 성화가 최초로 타오른 것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 림픽에서였다. 이때 성화 봉송은 없었으며, 아테네에서 채화된 불꽃 이 성화대에 담겼는데 그 모양은 고대 신전 성화대를 모방한 술잔 형태였다. 이 형상은 이후 100여 년 동안 성화대 디자인의 원형이 되 어 각 스타디움에 세워질 때마다 높이, 크기, 형태 정도만 바뀌는 정 도였다. 하지만 이는 엄밀하게 새로운 디자인이 아니라 스타일링의 변화이다. 단어와 개념으로 긴 시간 묶인 형상을 탈피할 때 비로소 진정한 디자인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다이슨 경이 원형 선풍 기를 선보인 이후, 세상의 선풍기는 날개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 로 나뉘었듯이, 성화대 디자인 역시 어느 시기, 변곡점을 지난 후 술 잔 모양의 디자인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주자들이 성화를 들고 달리는 지금의 ‘성화 봉송’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리스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에서 채화 된 성화가 불가리아와 옛 유고 연방,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슬로 바키아를 달려 1936년 8월 1일 베를린의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섰 다. 하지만 이 국가들이 이때부터 3년 뒤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에게 역순으로 차례로 침공당한 나라가 되면서 성화 봉송 은 야유와 풍자의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최초의 성화 봉송은 히틀 러 정권의 침공 루트 답사였다고 이야기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성화 봉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잠시 사 라졌지만 1952년 헬싱키 올림픽부터 의무화됐다. 헬싱키 올림픽 성 화대 역시 술잔을 세워둔 모양이었다.

 

 

2016년 리우 올림픽 성화대

 

점화식의 발상 전환과 감동
이렇게 성화대는 잔 모양으로 계속 디자인되었고, 점화 역시 최종 주 자가 성화봉을 번쩍 치켜들면서 감동을 연출하는 것이 관습이었으 나 1984년 LA 올림픽에서 이 관습이 먼저 끝났다. 마지막 주자는 성 화대 밑에 설치된 오륜기 마크에 불을 붙였고, 불은 오륜기 마크를 따라 경기장 상단의 성화대로 옮겨붙었다. 불꽃이 순식간에 타오르 는 동안 사람들은 감탄했고, 감동했다. 이어서 1988년 서울 올림픽 에서는 최종 주자인 임춘애 선수를 비롯한 3명의 주자가 엘리베이 터를 타고 올라가 불을 붙였다. 이 광경 또한 장관이었고, 짧지만 벅 찬 장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는 법. 개막식에 날려 보낸 비둘기들이 술잔 모양의 성화대 가장자리에 빙 둘러앉아 있다가 불길을 피하지 못해서 타 죽는 장면이 방송에 송출되면서 이 점화식은 최악이 되었고, 이후 비둘기는 올림픽에서 영영 사라진다. 엘리베이터는 이어령 전 장관의 설명에 의하면 두레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점화는 또 한 번의 감동이었다. 최종 주자에게 불꽃을 이어받은 사람은 장애인 양궁선수였고, 그가 쏘아 올린 불붙은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성화대에 안착했다. 전 쟁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불화살이 현실에서는 장애, 투혼, 집념, 훈 련의 감격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점화 방식이 바뀌면서 성화대 디자인 자체에 변화의 물결이 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 방, 관습은 살짝 건드려져 한 번 무너지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 럼 스스로 진화하여 혁신적 국면을 계속 창조해가니 말이다.

 

불로 살아 움직이는 성화대 
1996년 올림픽 100주년에 개최된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성화대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진다. 하지만 역시 디자인보다는 사람이 먼저. 올 림픽 개막식에서는 누가 최종 주자가 되느냐가 최대 관심사이다. 애 틀란타 올림픽의 최종 주자는 파킨슨병에 걸린 무하마드 알리였다. 그가 표정 없는 힘든 얼굴로 떨면서 하단에 붙인 불꽃이 기름에 젖 은 선을 타고 순식간에 올라가 박스들이 쌓인 모양의 성화대에 점화 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두고두고 최대의 장면이라고 하고 있지만, 막 상 성화대 디자인에 대해서는 악평이 많다. 미국의 컨트리 뮤직 같 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성화대

 


1963년 베를린 올림픽 성화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성화대는 엄청난 비약이었다. 점화자가 물 이 쏟아져 들어오는 연못 한가운데서 바닥에 원형으로 불을 붙였 고, 곧바로 그를 둘러싼 원형 성화대가 위로는 맹렬한 불꽃을, 밑으 로는 힘찬 물줄기를 내뿜으려 경기장 꼭대기로 이동하는 장면을 연 출했다. 불과 물이 장관을 이루면서, 성화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물체에 운동이 더해지면서 이후부터는 스펙터클의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숨어있던 타원형 봉 모양의 거대한 성화대가 몸체를 드러내며 수직으로 세워지는 장면, 2008 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몸에 와이어를 장착한 체조선수 리닝이 성 화봉을 들고 경기장 벽면을 내달려 불을 붙이는 액션을 보여주었 고, 불꽃은 순식간에 회전하는 나선형의 성화대에서 타올랐다.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200명의 소년, 소녀가 점화하여 수직으로 하나씩 세워져 가던 성화대, 2016년 리우 올림픽의 타오르는 키네틱 아트 성화대는 철제 장식으로 만들어진 꽃잎이 성화의 불꽃을 반사 하며 ‘살아 움직이는 성화’였다고 이야기되며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성화대로 회자된다.
지난 3월 20일, 도쿄 올림픽 성화가 동경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들 은 내년 3월에 후쿠시마에서 성화봉송을 시작하겠다고 하면서 올 림픽 개최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스타디움은 완공되었는데 그 안에 성화대가 없어서 치도곤을 치루고 있고, 아직 디자인도 알 수 없다. 인공지능, 드론, 스스로 자라나는 건축 자재 등 지난 올림픽 이후 조 형과 인간 행위의 결합에서는 수많은 가능성이 또다시 생겨났다. 도 쿄 올림픽의 성화대와 점화가 어떤 모습일지, 어떤 불의 스펙터클을 보여줄지 포스트 코로나시대 올림픽의 감동이 기대된다.

 

글을 쓴 조현신은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 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 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화에 관심이 많다. 2018년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 화사』를 출간했다.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