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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몸 글씨에서 눈 글씨로, 근대기 타이포그래피의 도상들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작성자 박윤진
  • 작성일 20.12.02
  • 조회수 300


전통기의 글씨는 재주를 넘어 인격과 수양을 드러내는 도구였기에 지식인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 기량이었다. 아마도 당나라 때 관리를 뽑기 위한 항목이었던 신언서판(身言書判)에 기인한 평가 기준이 서여기인(書如其人: 글씨는 곧 그 사람)으로까지 확장됐을 것이다. 한국 근대기의 책 표지에는 몸으로 쓰는 글씨, 즉 정신의 물화인 서예체가 제호로 사용되면서 1940년대까지 꾸준히 등장했다.

이는 한자에서 한글로, 서예에서 손글씨로, 이를 좀 더 다듬은 레터링에서 활자체로까지 변해간 제호 타이포그래피 변천의 한 흐름이었다. 동시에 정신과 몸의 합일을 통해 전인적 품격을 형성한다는 지식인들의 신념이 사라져가는 과정이었고, 총체적 정보 유입보다는 오로지 시각만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현대화의 한 과정이기도 했다. 


운필(運筆)의  서예 미학

  

『대한자강회월보』 대한자강회, 1907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계몽단체, 정치단체, 학회가 많이 결성됐는데, 이 중 대표적인 단체인 대한자강회의 『대한자강회월보』 표지를 보자. 녹색 바탕에 선명하게 붉은 조선반도의 지도는 강한 보색대비로 역동성을 보인다. 반도 전체를 백발의 제호가 뚜렷이 메우고 있는데, 사람이 두 발로 굳게 서 있는 듯한 ‘대(大)’ 자를 비롯해 각 한자의 획은 힘찬 기운으로 한반도를 덮고 있다. “운필할 때의 심경과 생리가 우주의 흐름에 부합되면서 흐른다”는 서예의 본질을 드러내면서 을사보호조약의 수치와 울분을 ‘스스로의 강함(自强)’으로 극복

하자는 의지를 뚜렷이 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구본웅이 디자인한 『청마시초』 청색지사, 1939      정지용이 제호를 쓴 『화사집』 남만서고, 1941

 

한용운의 『님의 침묵』, 유치환의 『청마시초』, 서정주의 『화사집』은 이러한 서예체의 골기를 계승한 대표적인 제호이다. 백지의 중앙에 아무런 수식 없이 붉은색으로 자리 잡고 있는 『님의 침묵』에서는 글이 쓰이는 자세가 보이는 듯하다. 구본웅이 디자인한 『청마시초』 역시 붉고 거친 한지 위에 흰색의 갈필 기법을 써서 생명파 시인 유치환의 원시적 생명에 대한 갈구를 형상화했다. 서정주의 『화사집』 역시 한 귀퉁이에 제호만 인쇄되어 있다. 정지용이 추사체를 모방해서 썼다고 알려진 이 제호는 시의 내용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늘에 꼬여

두를까 부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스며라 배암”이라 표현된 꿈틀대는 유혹자 뱀의 본성이 글자를 타고 흐른다. 1920년대 최고의 지식인 잡지였던 『개벽』은 총 8개의 다양한 서예체 제호를 쓰면서 당대 지식인들의 정신을 글자 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식과 기계 미학의 발현

 

 

(왼쪽부터 차례대로) 『은세계』 동문사, 1908 / 『공도』 공도사, 1924 / 조각가 김복진이 디자인한 『문예운동』 백열사, 1926 / 이상이 디자인한 『중성』 중성사, 1929

 

정신과 몸의 합일로 쓰이는 서예체가 점차 눈의 욕망과 장식성을 추구하는 시각 중심의 근대성에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특히 대중적인 성향의 책일수록 다듬고 장식하는 타이포그래피를 선호했다. 원각사에서 1908년에 연극으로 공연된 딱지본 신소설 『은세계』의 제호는 ‘신연극’ 활자를 집자해 제목을 만들면서 새로운 활자 기술에 대한 흥미를 보여주고 있다. 정체성이 모호한 잡지라고 평가받는 대중잡지 『공도』는 한자를 아르누보(Art Nouveau: 1890~1910년 사이 유럽 및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 양식) 방식의 장식적 문양으로 서예의 본질인 한 번에 써 내려가는 일회성과 율동성의 미학이 실종된 대표적인 예시이다.

1920년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잡지인 『문예운동』은 조각가 김복진이 디자인했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의 근간을 보여주는 기술과 노동에 대한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화살표와 직각의 기하학적 직선, 음영의 반복을 통해 기계적 감수성을 발산하고 있다. 시인 이상이 디자인한 대중잡지 『중성』은 당시 광범위하게 보급된 영상물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공명하며 점점 넓게 퍼져나가는 대중의 목소리 가운데에 당시 이 잡지의 기획기사였던 ‘미신타파(迷信打破)’를 붉은색으로 끼워 넣어 활자의 배치, 색채가 지닌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 당시 서구에서 페르낭 레제(Fernand Lée)가 기계의 차갑고 즉물적인 감성을 보여주는 기계 미학을 창안했다면, 조선의 조각가 김복진은 카프 예술의 신경향적 미학을, 이상은 대중의 가능성을 새로운 기술 기계의 감수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근대적 글자체의 대명사 고딕체

 

『청춘』 신문관, 1914  / 『어린 페터』 창문사, 1930 / 『갈돕』 신문관, 1922

 

근대기 책 표지 타이포그래피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고딕체의 사용이다. 고딕체는 서구에서 ‘산세리프체’로 불리는데 이는 세리프, 즉 글자체의 삐침이나 돌기가 없는 글자체를 말한다. 곧은 직선만으로 이루어진 이 활자체는 서구 아방가르드(전위예술: 기존 예술에 대한 인식,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예술의 개념을 추구하는 예술 운동) 디자이너들의 이론적 배경을 기반으로 근대정신을 나타내는 서체로 사용됐다. 조선에서도 고딕체가 등장하는데 잡지에서는 1910년대에 최남선이 운영하던 신문관의 『아이들보이』와 『청춘』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 번역 소설에 주로 사용됐다. 노자영의 초베스트셀러 연애서간집인 『사랑의불꽃』 또한 고딕체이다. 동화 『어린 페터』의 표지는 고딕 타이포그래피를 변형하면서 장음 기호를 붙여서 소리에 리듬을 부여한 시도를 보인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김동준이 디자인한 『해』 청만사, 1949 /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 『부초』 민음사, 1977  / 정병규가 디자인한 『책』 민음사, 2012 

 

이 외에 글자의 형상으로 책의 본질을 표현하려 한 시도는 다양하다. 『갈돕』은 ‘갈고 돕자’는 뜻으로 조선 고학생들의 잡지이다. 고딕의 묘미를 발전시켜 위아래를 강조하고 가운데 부분을 연결고리로 한 것은 고학생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시각적 기호이다. 박두진의 시집 『해』는 김용준이 디자인한 것으로 해의 형상, 아폴론 전차의 바퀴, 제호 『해』의 둥근 레터링의 반복은 시의 한 구절,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해야 솟아라”에서 흐르는 리듬감을 보인다.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의 근대 최초의 개인 창작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는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을 실험해본 근대기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자 서예체에서 한글로, 고딕체로, 레터링으로 변해오면서 다각적인 형상성을 보인 표지 제호는 1950년대에 들어 거의 각기 표정을 지닌 손글씨의 모습으로 진행된다. 이후 1970년대에 정병규의 『부초』를 시작으로 정보만을 제공하는, 스마트한 활자체 제호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근래 정병규가 디자인한 『책』은 다시 글자 모양의 형상성을 통해 텍스트의 본질을 부각시키는 감성 중심의 캘리그래피를 선호하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책의 얼굴에는 몸과 정신의 합일체인서 예에서 활자를 거쳐 눈의 감각적 묘미를 찾는 캘리그래피까지 다양한 타이포그래피가 각 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시각적 기호이다. 박두진의 시집 『해』는 김용준이 디자인한 것으로 해의 형상, 아폴론 전차의 바퀴, 제호 『해』의 둥근 레터링의 반복은 시의 한 구절,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해야 솟아라”에서 흐르는 리듬감을 보인다. 김소월의 스승인 김억의 근대 최초의 개인 창작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는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을 실험해본 근대기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자 서예체에서 한글로, 고딕체로, 레터링으로 변해오면서 다각적인 형상성을 보인 표지 제호는 1950년대에 들어 거의 각기 표정을 지닌 손글씨의 모습으로 진행된다. 이후 1970년대에 정병규의 『부초』를 시작으로 정보만을 제공하는, 스마트한 활자체 제호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근래 정병규가 디자인한 『책』은 다시 글자 모양의 형상성을 통해 텍스트의 본질을 부각시키는 감성 중심의 캘리그래피를 선호하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책의 얼굴에는 몸과 정신의 합일체인 서예에서 활자를 거쳐 눈의 감각적 묘미를 찾는 캘리그래피까지 다양한 타이포그래피가 각 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조현신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 표현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글항아리, 2018)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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