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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꽃으로 말하다, 근대기 책 표지의 꽃들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작성자 박윤진
  • 작성일 21.01.11
  • 조회수 452

 


캐나다의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는 먼 옛날 누군가 우연히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위대한 진보의 한 발자국이 떼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 미학의 출발점을 꽃 한 송이와의 만남으로 잡은 것이다. 꽃은 가냘프고 약한 존재이나 역사상 한 집단의 문장이나 심벌로 가장 선호도가 높은 소재이고, 동서양 미술에서 빈번하게 등장한 재현물이다. 

전통기에는 꽃이나 식물, 동물의 특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이입을 하면서 역사를 만들어왔기에, 거의 모든 꽃이 꽃말과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자연을 분해하고, 응용하기 시작한 과학의 발달은 자연이 품은 상징성을 추방했고, 꽃은 이후 눈에 보기 좋은 장식적 기능만 갖게 됐다. 이런 변화는 책 표지에서의 꽃의 표현 양식에서도 드러난다. 

​『춘향가』와 잡지 『소년』 속의 꽃들 
  


                                         1912년 이해조의 신소설 『옥중화』 보급서관, 1914                        『소년』 ‘24번의 화신풍’ 특집 중, 1909년 5월                                       

전통기에는 식물의 문양과 꽃 그림을 그린 능화판에 밀랍을 입힌 후 눌러서 만든 천으로 책 표지를 만들었기에 당연히 표지는 올록볼록한 촉감만을 지닌 무채색의 얼굴이었다. 서책을 중시하던 선비들의 고고한 자세를 보여주는 의장이라고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들어온 컬러 인쇄기 덕분에 근대기 책 표지에는 화려한 그림과 색깔이 들어갔다. 당시의 독서물 중 최고의 인기작이었던 딱지본 신소설 『옥중화 춘향가』의 표지를 보자. 짙은 노랑 바탕 위에 빨간 꽃 한 송이가 비스듬한 각도로 놓여 있다. 이 꽃은 옥에 갇힌 춘향을 대신하면서 그녀의 붉은 마음, 일편단심을 보여준다. 이몽룡과의 첫 만남의 장소였던 광한루와 강, 산이 그려진 또 하나의 책 표지는 마치 옥에 갇힌 춘향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이중의 내레이션을 형성하고 있다. 이 표지는 관재 이도영의 것으로 당대 최고 화가의 그림을 인쇄물로나마 대중도 소유할 수 있게 한 딱지본의 전형이다. 

한국 최초의 문화기획자 최남선은 그가 발간한 잡지 『소년』에서 ‘24번의 화신풍(花信風, 꽃이 피었음을 알리는 바람)’이라는 제목으로 소한(小寒)에 피는 꽃은 매화, 우수(雨水)에 피는 꽃은 배꽃 등으로 절기별로 24개의 꽃을 배치하고, 책 전권을 꽃에 대한 정보로 채웠다. 본문에서는 조선 3도의 형상을 열매 송이와 꽃의 외형으로 묘사하여, 조선 반도의 모습을 호랑이로 그려 호랑이를 민족 상징으로 정착시킨 선구자다운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진달래와 오얏꽃, 무궁화 


 


                                                             『진달래꽃』 매문사, 1926                                          『인간이은』 한국일보사, 1971                                                                                                    

 

한국 가곡의 20%를 차지한다는 시인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 표지를 보자. 그의 생전에 발간된 유일한 이 시집의 초판본은 2015년 경매에서 현대문학 서적 중 최고의 값인 1억3500만 원으로 낙찰됐다. 민화 속의 기암괴석(奇巖怪石) 옆에 꽃을 피운 진달래가 서 있고, 서툰 서체로 제목이 쓰여 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하며 이별을 아파한 시구답지 않게 나무의 형상은 무심하다. 이후 수많은 판본의 표지 디자인이 생산되지만, 100년 전 디자인적 기교나 조형 원리가 적용되지 않은 초판본 시집의 표지가 가장 『진달래꽃』답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생활고에 치이고, 결국 자살을 한 시인의 삶처럼 무게 없는 것들의 무게에 치인 채 순환하는 삶, 그 속에서 인간은 결국 “저 멀리 혼자 피어”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들임을 어리숙한 표상으로 재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초판본은 원본 그대로 복각되어 젊은이들의 애장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일상의 상징과는 다른 꽃의 모습도 있다. 『인간이은』의 표지를 보자. 조선 최후의 왕 영친왕의 일대기인 이 책 표지에는 이왕가(李王家)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이 새겨져 있고, 표지를 벗기면 하드 양장본에 금박으로 깊게 새겨진 또 하나의 오얏꽃이 등장한다. 당대 만들어진 모든 로고가 그렇듯이 정확하게 칼로 벤 듯한 기하학적 미감을 지니고 있다. 근대기의 기계 미학과 일본의 감각이 혼용된 듯한 모양새인 이 오얏꽃은 조선 황실의 정식 문장으로 현재 디자인 제품 소재로 자주 쓰인다. 

 

  

해방 후 『초등국어』 교과서 표지. 문교부, 1949 

 

해방 후 『초등국어』 교과서 표지에는 무궁화꽃이 그려져 있다. 무겁고 장중한 이원모체에 어린아이의 감성으로 쓴 타이포그래피를 병치해 그 무게를 상쇄시키고 있으나 수묵으로 들어간 이 무궁화는 아이들의 마음에 국가라는 거대 집단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심어주기 위해 사용된 시각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인간사의 대리물 

 


                                                         『무정』 박문서관, 1934                                                         『무서록』 박문서관, 1941                                                                                                                                                  

개인의 심리를 묘사한 최초의 근대소설이자 베스트셀러였던 이광수의 『무정』의 표지는 정현웅의 작품이다. 무미, 무감의 부드러운 원형의 잿빛 바탕에 잔잔하게 흩어지는 흰 꽃송이들은 고난과 신산함의 삶이었지만 계몽적, 희망적 다짐으로 끝나는 주인공 영채의 대리물일 것이다. 김용준이 디자인한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에 등장한 수선화는 조선에서 근대기까지 꽃 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책 표지에 등장했다. 조선후기 서화가 김정희가 중국에 가서 수선을 본 후 즐겨 감상했고, 정약용에게 선물한 스토리를 품고 있어, 당시 선비들에게 수선을 그린다는 것은 일종의 지적 오마주였던 것이다. 제목을 두른 넉넉한 붉은 선과 옹골찬 뿌리를 보이는 필묵의 노란 수선이 대조를 이루며,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조선적 미감을 살리려 노력했다는 김용준의 담백한 미감을 볼 수 있다. 

 


                                                 『청춘보』 경향출판사, 1947                                                           『울릉도』 행문사, 1948                                                                                                                                                                     

  
(차례대로) 『촛불』 대문사, 1956 /  『역사는 흐른다』 정음사, 1956 / 『소정시초』 현대사, 1953

 

함대훈의 장편소설 『청춘보』의 옅고 푸른 하늘, 겨울눈에 흩날리는 분홍빛 장미송이는 말 그대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청춘에 대한 경의이기도 하고, 유치환 시집 『울릉도』의 붉은 동백은 극도로 멋을 부린 전서체 제호와 함께 조선 아르누보적 미감을 보이기도 한다. 이 외 신석정 시집 『촛불』 표지의 검은 밤 한들거리며 핀 붉은 꽃과 풍성한 잎새는 시각적으로 촛불의 연약함과 아름다움의 동형상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방기 이후 한국 화가들에 의해 제작된 표지는 대부분 추상화로 전개됐는데, 『역사는 흐른다』의 표지는 천경자 작품으로 반구상이며, 『소정시초』에서 색은 화려해지지만 꽃의 형상은 작가의 해석대로 전개된다. 

더 이상 2차원 평면에서 대상의 재현은 의미가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가상현실, 확장현실 속의 꽃들은 오히려 현실보다 더 생생하며, 꽃봉오리가 벌어지는 순간까지, 새소리와 함께 감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낡은 책 표지 위의 꽃 한 송이가 마음 깊게 다가오는 것은 그들이 책에서 전개되는 수많은 인간사를 품은 불변의 대리물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현신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 표현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글항아리, 2018)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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