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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푸틴이 택시운전? 그래도 행운아, 차라도 있었으니까” / 란코프(교양대학) 교수

  • 작성자 고은나라
  • 작성일 21.12.27
  • 조회수 702


[소련 해체 30주년-상]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 인터뷰
“물가는 치솟고 월급은 10분의 1로
극심한 빈부차, 굶어죽은 이도
과도기 10년 핵무기 관리 다행”

“화장실 휴지도 없어 붕괴 불가피
미국 맞섰던 옛 소련만 그리워해
우크라 공세는 서구 압력 수단”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양학부 교수. 최현준 기자

 

 

옛 소련 시절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푸르크)에서 태어난 안드레이 란코프(58·국민대 교수)는 스물여덟 살이던 1991년 12월 세상이 뒤바뀌는 경험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어깨를 겨루며 50년 가까이 세계를 양분했던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존경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조국은 하루 아침에 15개 공화국으로 뿔뿔이 나뉘었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자부심은 망한 나라의 가난한 국민이라는 수치심으로 변했다. 물론, 희망도 있었다. 공산주의 체제를 버리고 자본주의 새 옷으로 갈아 입은 만큼 머지않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구권 국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먼저 찾아온 것은 혼란이었다고 란코프 교수는 기억했다. 지난 17일 서울 정릉에 있는 국민대 북악관에서 그를 만나 당시 상황과 소회를 들었다.


-1991년 12월 소련 해체 당시, 어디서 뭘 했나.


“당시 레닌그라드 대학 한국사학과 조교수였다. 학생들에게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한국어를 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한국사는 왜 전공했는지.

 

 “어려서부터 중국 등 동아시아에 관심이 많았다. 1981년 레닌그라드대 중국사학과에 입학했다가 교수의 권유로 한국사학과로 옮겼다. 석·박사 기회를 주고, 북한 유학도 시켜준다길래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과’했다. 1984~1985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운이 좋게도 1988 서울올림픽 이후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가 본격화했고, 한국 대표단이 러시아를 자주 찾았다. 소련 해체 뒤에는 하루이틀 이들을 따라 다니며 통역하면, 조교수 수입 한달치와 맞먹는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김우중 대우 회장 일행을 통역한 것도 기억난다.”


란코프는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중앙대에서 러시아어 강사를 했고,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를 거쳐 2004년부터 국민대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유학시절 만난 러시아 여성과 결혼했고,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에서 산 대표적인 지한파 러시아인 교수다.


-소련 해체 직후의 상황은.


“(큰 경제적 곤경을 겪지 않은) 난 좀 특별한 케이스라 해야 한다. 소련 해체 뒤 약 10년 간의 체제 변환기에 옛 소련 지역 국가 주민들이 고난의 시기를 겪었다. 무엇보다 물가가 크게 올랐다. 체감상 약 10배 정도 오른 것 같다. 당시 내 조교수 월급이 지금 한국 돈으로 300만원 정도였는데 30만원대로 줄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들의 피해가 컸다.”


-하루 아침에 자본주의가 도입돼 많이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일부 시민들이 생계를 위해 거리에 작은 매대를 차렸다. 볼품없는 구멍가게 수준이었지만, 소련 시절 어느 상점보다 다양하고 질 좋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나도 거리에서 녹음기 도매를 했다. (장사) 실력이 없어 성공하진 못했다. 당시 경찰이 힘을 잃고 조직폭력배들이 판을 쳤다. 시장 상인들이 문제가 생기면 경찰 대신 조직폭력배를 찾을 정도였다.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찰들은 뒷돈을 받는데 공권력을 활용했다. (소련 시절엔) 저녁에도 큰 불안 없이 거리를 다닐 수 있었는데, 점점 힘들어졌다.”


-빈부 격차도 심해졌다고 들었다.


“아니러니하게도 생산 수단, 경험, 학력 등을 독점했던 공산당 간부 출신들이 사회 지배층이 됐다. 20~30대 젊은층 가운데 새로운 도전에 나선 이들도 부자 대열에 들어섰지만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도시민들은 빵과 감자만 먹어야 했고, 시골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최근 소련 해체 뒤 생활고로 택시 운전을 해야 했다고 고백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그래도 푸틴은 운이 좋은 편이다. 자가용을 갖고 있지 않았나.”


-체제가 바뀌는 과도기는 얼마나 오래 갔나?


“푸틴이 집권하기 전 약 10년 동안(1991년 12월 소련 해체에서 푸틴이 등장하는 2000년 5월까지)인 것 같다. 다행인 것은 이때 대량 살상이나 내전 등이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겠지만, 내 생각했던 것보다 혼란이 크지 않았다. 워낙 부정적으로 전망한 탓이 큰 것 같지만. 소련 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러시아의 첫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이 비교적 잘 관리를 한 것 같다. 그들은 소련 해체 당시 올바른 결정 몇 가지를 했다. 핵무기를 잘 관리했고, 옛날 국경을 그대로 유지했다. 만약 국경을 바꾸기 시작했다면, 15개 공화국이 서로 많은 피를 흘렸을 거다.”

 

러시아 공산당 지지자들이 21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스탈린 탄생 142주년을 기념하는 푯말을 들고 있다. 모스크바/AFP 연합뉴스


-그래도 러시아에서는 지금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미국과 맞섰던 소련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청장년층도 있지만 압도적으로 노인들이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과거 제국주의에 대한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 이런 흐름이 강하고, 다른 공화국들은 좀 덜하다. 푸틴의 인기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푸틴이 공세적인 대외 정책을 펴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지한다. 소련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소련은 왜 무너졌나.


“간단하다. 소련은 인공위성을 만들었지만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었다. 이게 바로 소련이 무너진 이유다. 소련은 우주, 국방, 중공업 등 특정 산업에서는 미국과 경쟁하고 때로는 앞섰지만 다른 산업 분야는 형편 없었다. 특히 주민들은 일상 경제 생활에 불만이 많았고 1980년대 말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공산주의는 노동과 자본을 동원해 10년, 20년 동안 고도 성장을 이룰 수 있다. 문제는 (생산성 향상에 기반한) 지속 가능한 성장이 아니라는 거다. 소련도 1960년대 들어 경제 둔화가 심각해졌고, 다른 사회주의 국가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반면 현재 중국은 건재하고, 미국과 대결할 정도로 성장했다.


“현재 중국은 붉은 색을 칠한 극한의 자본주의 국가이다. 당시에도 중국은 소련과 달리 공산국가가 아니었다. 1980년대 초부터 개혁개방을 했고, 공산주의는 간판일 뿐이었다. 소련도 좀 일찍 개혁개방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너무 늦었다. 두 나라는 반체제 운동에 대해서도 (대응에) 차이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1989년 베이징 톈안먼 민주화 운동 때 광장에 모인 수백~수천명의 시민을 죽였다. 소련에서는 1991년 보수파 쿠데타 때 죽은 사람이 딱 3명이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등에 대한 공포가 남아있었다. 그에 비해 소련은 중국보다 잘 살았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북한도 결국 살아남았다.


“북한은 극단적인 쇄국 정책을 폈고 공포 정치를 했다. 북한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것 같다. 미국과 중국이 싸우면서 북한은 대안을 찾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맞았다. 북한 엘리트 계층은 소련 엘리트들과 달리 체제가 바뀔 경우 미래가 없다.” 란코프 교수는 현재 북한 전문가 활동하며 <리얼노스코리아> 등의 책을 썼다.


-러시아는 과거 북핵 관련 6자 회담 당사국이기도 했는데, 앞으로도 한반도에서 역할을 할까.


“러시아는 당연히 한반도 미래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고자 한다. 하지만 중국이나 미국보다 관심이 크지 않다. 굳이 큰 돈을 내면서까지 참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의 목적은 중국과 비슷하다. 한반도에서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2~3년 전이라면 남북한에 변화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미·중 냉전이 격화할수록 그 가능성은 낮아질 것이라 본다.”


-최근 우크라이나를 놓고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러시아가 실제 전쟁을 일으킬까.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다. 다만, 제 주변에 있는 전문가들 얘기를 들어보면 실제 공격까지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는 듯 하다. (현재 긴장 조성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에게 압력을 넣기 위한 수단인 듯 하다.”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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