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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세계와우리] 우크라이나 전쟁과 국제체제의 미래 / 장덕준(유라시아학과) 교수

  • 작성자 이해인
  • 작성일 23.06.12
  • 조회수 236

 中·러 다극체제 구축 본격화
美 등 서방 대러 적대정책 강화
분명한 것은 보편적 규범 바탕
인류 공통과제 해결 연대해야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국제정치도 그 속성은 마찬가지다. 다만 국내정치보다 변화 속도가 더딜 수는 있다. 국제정치의 변화 양상을 거시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국제체제’라는 개념이 사용된다. “국제정치 행위자들 사이에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는 구조와 과정”을 국제체제라고 일컫는다. 그 가운데 핵심적인 요소는 주요 강대국 간 힘의 배열 상태이다.

 

냉전 시기 국제체제는 미국과 소련이 세계정치를 지배하는 ‘양극 체제’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입 미국의 라이벌 소련이 급작스럽게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됨으로써 양극 체제가 무너졌다. 이에 서방 일각에서는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보편화하는 ‘역사의 종말’ 단계에 도달했다고 환호했다. 미국이 세계 질서를 지배하는 ‘일극 체제’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1990년대는 그야말로 미국이 국제 질서를 지배하며 독주하던 시기였다.

▲장덕준 국민대 교수·유라시아학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국제체제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면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러시아 또한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에 힘입어 빠른 경제 성장을 기록했다. 반면 2008년 일어난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헤게모니의 상대적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2010년 이후 일본을 추월해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이 된 중국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다극 체제’ 담론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인도, 브라질 등 비서방 세력 또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제 질서는 바야흐로 다극 체제로 접어들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러시아와 중국이 지난 수년간 줄기차게 주장해 온 다극 체제 담론에는 몇 가지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첫째,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국제 관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목적이다. 둘째, 중국과 러시아가 다극적 질서의 구도 아래 동아시아와 유라시아(소련) 지역에서 각각 세력권을 형성하려는 목적이다. 셋째, 다극 체제 담론을 주도해 러시아와 중국은 스스로 글로벌 수준의 강대국으로 인정받고자 한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 질서 담론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지난 3월31일 발표된 ‘러시아 연방 대외정책 개념’은 전쟁 당사국 러시아의 국제 질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이 문건은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조치’를 명분 삼아 대러시아 적대 정책을 더 강화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러시아는 인도, 중국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2016년 ‘대외정책 개념’과 비교해 이 문건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모스크바가 스스로를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아우르는 ‘독자적 문명권 국가’이자 ‘유라시아 및 유럽-태평양 국가’로 지칭하고 있는 부분이다. 러시아는 스스로를 서구 문명의 대안으로 주장하는 동시에 자국이 국제 질서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임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미국과 중국의 양극 체제가 공고화할지, 아니면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러시아, 글로벌 사우스 등 다양한 세력이 공존하는 다극 체제로 갈 것인지 속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양극 체제든 다극 체제든 미래 인류 사회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서는 분명한 원칙이 필요하다. 우선, 미래의 국제 질서는 주권의 불가침성, 영토의 온전성, 갈등의 평화적 해결 등 보편적인 규범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국제사회는 또한 환경 위기, 국제 보건 문제, 인구 문제, 빈곤 문제, 핵확산 문제 등 인류 공통의 과제 해결을 위한 국제 협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원칙 없이는 향후 국제체제가 어떤 형태가 되든 세계는 강대국 간 힘과 이익이 적나라하게 부딪치는 끔찍한 쟁투의 장이 될 뿐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동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각국이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세계는 한층 평화로워질 것이다.


장덕준 국민대 교수·유라시아학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 이 기사는 '뉴스콘텐츠 저작권 계약'으로 저작권을 확보하여 게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