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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은종학의 퍼스펙티브] ‘자유로운 청년’이 최고 자원…그들의 잠재력을 자극하라

  • 작성자 박채원
  • 작성일 23.12.19
  • 조회수 213

미·중 경쟁시대 넘어서기, 중국이 가지 못한 길

 

 


은종학 국민대 중국정경전공 교수

 


장면 하나. 지난 11월 5일 일요일 한낮, 상하이의 대형 백화점은 썰렁하리만큼 한산하다. 하지만 같은 시각, 멀지 않은 곳의 티엔즈팡(田子坊)엔 사람이 많다. 역시 물건을 사는 이는 적은 듯하지만,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안내하는 옛 마을 테마 공간인 이곳엔 거닐고 사진 찍고 그사이 차 한잔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새 상품을 구매하여 소유하려는 물적 욕구는 경기침체 속에 감퇴하였지만 삶을 경험하려는 욕구는 남아 있다. 여기서 첫 번째 힌트를 얻는다.


MZ세대가 직장을 그만두는 이유

 

 


지난 11월 초에 방문한 중국 상하이의 한 대학 풍경. 마오쩌둥 동상과 ‘새로운 여정에 분발 전진하자’는 내용의 신시대 건설을 주창하는 시진핑 시대의 구호가 보인다. [중앙포토]

 


장면 둘. 한국에서도 MZ세대가 직장을 그만둔다. 고연봉과 풍부한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소수의 직장 앞에서 최상위 능력자들은 옛 공식을 따른다. 치열한 노력, 경쟁, 성취의 공식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우를 약속하지 못하는 ‘그저 그런’ 직장은 젊은이들의 버림을 받는다. ‘소중한 젊은 시간을 희생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막막한 모색을 하지만 통계 분류상으로는 ‘그저 쉰단다’. 직장을 떠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연봉과 같은 최고의 대우라면 좋지만, 아니라면 적어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한다. 여기서 두 번째 힌트를 찾는다.


장면 셋. 동력을 잃어 어두워진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칼럼 끝에 어김없이 기술혁신, 첨단과학, 연구개발(R&D)에 대한 강조가 등장한다. 물론 과학기술에서 앞서간다면, 심지어 ‘초격차’까지 만들어낸다면 우리의 경제적 기회가 커지는 것은 맞는다. 당연하다.


요즘 젊은이는 ‘진짜 하고 싶은’ 일 추구…돈보다 창의 중시
‘시진핑 말씀’ 따르는 중국의 오늘, 새로운 동력 찾기 힘들어
디지털 시대에는 소유보다 체험, 교육과 문화의 역할 늘어나
AI 활용해 ‘한국어 장벽’ 허물고 더 개방적인 사회 만들어야


하지만 많은 학자, 관료, 칼럼니스트들이 전개하는 그러한 논의의 일면은 ‘현대판 기우제(祈雨祭)’다. 하늘에서 선물이 떨어지듯, 사회경제 시스템 외부의 과학기술계가 골치 아픈 사회경제의 문제를 풀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과학기술계를 향한 기원과 응원은 좋지만, 비과학기술계가 모두 주변화하고, 운동장이 아닌 응원석이 비대해지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다.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게 세 번째 힌트다.


장면 넷. 미·중 갈등으로 세계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니다. 세계화로 하나가 된 세상에서는 최고의 기술이 전체 시장을 호령한다. 하지만 쪼개진 세상에서는 각 지역의 기술적 승자가 병존할 수 있다. 이류 기술도 ‘갈등의 보호막’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포위된 중국도 과학기술에서 주저앉지 않는다. 봉쇄와 제약을 우회하는 기술경로를 개발할 것이다. 그래서 과학기술의 우열만으로 세계를 논하고 점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즉, 비과학기술의 영역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는 게 네 번째 힌트다.


과학기술이 전부는 아니다

 

 


상하이 중심의 대형 서점에 중앙에 진열된 시 주석 관련 서적. [중앙포토]

 


흩어진 힌트 위에 드러나는 우리의 갈 길은 무엇인가. 상품의 물리적 소유 극대화가 아닌 체험과 경험을 추구하는 세상. 진정 해보고 싶은 일들에 대한 젊은이들의 추구. 과학기술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으로 착각하고 주인공이 아닌 방관자로서 응원석에 끼여 앉는 일의 어리석음. 이런 것들을 곱씹을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창의(Creative), 자아실현(Self-Realization), 새로운 체험(Fresh Experience) 공간을 확대해야 할 필요성이다.


웅크렸던 자아를 당당하게 구현하는 뿌듯함. 그것이 주는 보상이 젊은이들의 진정성 있는 참여를 높일 것이다. 그런 생명력과 역동성이 미래 경제에 활력을 더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어야 한다. 창의적 콘텐트를 위해선 미술, 디자인, 음악, 문예와 뉴미디어의 역할이 클 것이며, 육체적 정신적 자아를 갈고 닦는 데는 관람을 넘어 직접 참여하는 다양한 사회 스포츠와 심리적 공감의 장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새로운 체험은 가깝거나 먼 여행, 다양한 모빌리티에 연계될 것이다.


‘냉혹한 진실(hard truth)’ 모드의 경제, 산업, 과학기술과 상반되는 것들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아니다. 그 둘을 갈라쳐서는 사회경제가 돌아가지 않는 지점에 왔다. 그래서는 소수만의 번성과 다수의 소외, 생명력·역동성의 상실과 침체를 피하기 어렵다.


이미 여러 과학기술 분야에서 한국을 추월한 중국도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중요한 조건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런 중국과 친구가 될 것인가, 적이 될 것인가’는 핵심적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다름’에 기초하여 중국에 ‘경쟁우위(competitive advantage)’를 가질 것인가. 이것이 진짜 핵심적인 질문이다. 경쟁우위란, 경쟁자가 쉽게 모방하여 가질 수 없는 독특성에 기초한 우위를 뜻하며, 중소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기초가 된다.


박물관 많은 중국, 콘텐트는 빈약


중국의 R&D 총지출은 2022년 한해 3조 위안(550조원)을 넘어섰다. 한국의 6배 규모다. 저성장 국면에서도 전년 대비 10.4%를 늘렸다. 우리는 그런 중국을 상대로 6배 높은 IQ와 6배 많은 노력으로 맞설 것인가. 물론 한국은 쪼개진 세상, 소외된 중국의 덕을 한동안 추가로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류를 타는 그 불안한 요행을 넘어 진정한 복안을 만들고 다져야 한다.

 

 


김영희 디자이너

 


중국도 문화창의산업을 이야기한다. 중국엔 문화적 축적이 엄청나다. 하지만 그 가치는 그것을 ‘뻔한 일상’이 아닌 ‘신선한 충격’으로 체험할 외지인, 외국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방성’이 낮아지면 중국의 문화적 잠재력도 절하된다. 창의로 넘어오면 중국의 한계는 더욱 크다.


최근 중국에 화려한 박물관들이 곳곳에 건설되었지만 내부의 큐레이션은 박제된 콘텐트의 교육용 진열대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다. 급증하는 박물관(2011년 2650개 → 2021년 5772개)과 달리 ‘살아있는’ 라이브 공연장은 줄어들었다. 진리와 창의적 해법을 추구해야 할 인문사회과학 혹은 정책 관련 회의의 각 세션 서두는 시진핑 총서기의 말씀으로 채워진다. 이런 오늘의 중국에서 창의를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유독 과학기술에 관한 한 그러한 회의 진행이 큰 방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경제학자 펠프스가 강조한 ‘개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에드먼드 펠프스(Edmund Phelps)는 2013년 『Mass Flourishing』란 제목의 책을 냈고 한국에선 ‘대번영’으로 소개되었다. 중국에서도 2015년 이후 리커창 총리가 주도한 ‘대중창업 만중창신(大衆創業 萬衆創新)’ 운동에 붐업을 해주는 책으로 환영받았다.


그런데 펠프스가 얘기하는 ‘flourishing’은 단순히 경제적 의미의 성장과 번영이 아니다. 펠프스는 flourishing을 ‘개인이 자기만의 것으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고 또 그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정의한다. 한마디로, 창의적 자아실현이다. 그것이 경제에 활력을 더하고 혁신을 추동한다는 것이 펠프스의 요지다. 덧붙여 그는 금전적 이득보다 개인의 가치 추구가 진정한 동력임을 확인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2015년 중국은 그런 깨달음 없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유명인사 펠프스를 초청해 행사를 벌였지만, 사실 펠프스의 사상은 중국이 본격 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근 갑자기 고인이 된 리커창 전 총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떤 설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한국은 중국이 제대로 가지 못하는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경쟁우위를 획득하는 길이다. 중국과 적이 될 필요는 없다. 다름으로 빛나는 길을 찾는 것이다. 펠프스에게서 영감을 얻되,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 내부와 주변의 힌트들에 주목하고 귀 기울여 정책을 세우고 추진해야 한다.


‘창의성 본산’ 대학의 기능 살려야


창의, 자아실현, 새로운 체험의 중요성과 잠재력을 인정하더라도, 펠프스의 지적처럼 이윤과 상업적 설계가 그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문화란 포장 아래 이념과 정파의 하수인들이 거짓된 작품들로 설친다면 그 또한 판을 흐릴 일이다. 따라서 청소년, 젊은이들이 내면의 창의성을 끌어 올리고 그를 구현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관건이다. 입시에 찌들지 않은 미술·음악·스포츠가 중등교육에서 더 큰 비중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돈벌이에 직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축된 대학 내 창의의 본산도 되살려야 한다.


과학기술과 비과학기술 영역이 제로섬(Zero Sum)을 다투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한국은 탁월한 통·번역 능력을 갖춰가는 인공지능(AI)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한국의 언어적 장벽을 완전히 걷어내고 대(對) 세계 개방성을 크게 높여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한국은 창의, 자아실현, 새로운 체험의 장을 창출·확대하고 세계를 우리 안에 끌어들여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 한국의 경제, 산업, 과학기술, 대(對)중국 경쟁 정책이어야 한다.


◆은종학 교수=서울대 경제학사·석사, 칭화대 기술경제경영학 박사. 『중국과 혁신』(2021) 등의 책을 썼다.


은종학 국민대 중국정경전공 교수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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