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퀵메뉴 메뉴에 대한 사용자 설정을 위해 쿠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뉴 체크 후 저장을 한 경우 쿠키 저장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국민*인의 비전을 묻다
예전에 한 교수님께서 이런 얘기를 한적 있다. “공원에는 날지 못하고 기어만 다니는 ‘닭둘기’라는 비둘기가 있다. 닭둘기는 분명 신체 구조상 날 수 있는데도 날지 못한다. 왜 그럴까?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눈앞에 먹을것이 놓여져 있으니 굳이 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목적이 있어야 능력이 개발되는데, 목적이 없으니 잠재능력도 죽는다.” 이 이야기 속에 국민*인들의 고민이 담겨있다. 목적이 없으니 생활이 무기력하고 핸드폰만 만지작 거린다. 이런 국민*인들을 위해 확실한 비전을 가진 전성현 학생(스포츠경영학 전공 09)을 만나 어떻게 비전을 찾게 되었는지,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아이들의,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선생님
제 비전은 아이들의, 아이들에 의한, 아이들을 위한 선생님이 되는 것입니다. 권위적으로 아이들의 위에 서려고 하지 않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을 바라봐주고,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애쓰며, 아이들 한명 한명을 인간으로서 대해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나아가 아이들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이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나마 영향을 미치고 싶습니다. 그 영향력이 아이들을 단 1%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 1%의 영향력이 나비효과가 되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우리나라 교육을 보면, 그저 점수를 따기 위해 가르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공부하죠. 그러다 보니 배움은 없고 경쟁만 남았어요. 되돌이켜보면 무엇을 배웠는지도 깜깜하죠.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이 수동적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정작 대학에 와서 진로를 찾지 못하고,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부모님이, 주변사람들이 하는 말만을 따라가는 학생들이 많아요. 저는 학생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춘기시절을 함께 하며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인성지도를 꾸준히 할 뿐 아니라, 체육수업에서도 경쟁이 주가 되지 않고, 각자의 신체적 능력에 따라 운동할 수 있는 변형체육 수업 모형을 도입하여, 학생들 모두가 즐기고, 모두가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체육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능동적으로 사회화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무엇이 꿈꾸게 했나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가세가 기울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우유배달, 신문배달부터 안 해본 일이 없죠. 깜깜한 밤에 나가 정신없이 우유배달을 하다 마지막 우유를 딱 넣고 돌아서면 붉게 떠오르던 해가 아직도 생생해요. 그 시절에 용돈은 당연히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500원도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함께 다니던 애들한테 늘 얻어먹기만 할 수 밖에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저를 은근히 따돌리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어린마음에 싸움을 잘하면 친구가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의 매일을 싸우며 지냈고, 폭력 써클에도 들어갔어요. 이렇게 엇나가던 저를 바로세워준 것은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잘못된 행동을 해도 믿어주고 외면하지 않는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며 조금씩 점점 변화하는 저를 느낄 수 있었어요. 오랜시간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제가 체육선생님이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은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 까지 제가 받은 은혜를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방황도 해보고 많은 풍파를 겪어 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학생들을 더 잘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를 간절하게 했던 그 시절
절절하게 가난했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머니는 제게 정신적 지지처이자 저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어요. 그런 어머니가 재수를 결심했던 20살 때 심한 우울증을 겪으시면서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하루종일 옆에서 지켜봐줄 사람이 있어야 했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죠. 항상 강했고 의지가 됐던 어머니가 피해망상으로 인해 죽고싶다는 말을 3분에 한번씩 하셨고, 그런 소리를 들으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시는 어머니의 불안증세를 하루 종일 지켜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재수를 하고있었지만, 정작 마음놓고 공부를 할수도 실기를 준비할 수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선생님이라는 꿈은 작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앞에서 울 수도 없으니 그 속상함을 풀데도 없어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6개월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가 괜찮아지시면서 그때서야 수능공부를 제대로 할수있었습니다. 약 4개월동안의 시간동안 수능과 실기준비를 같이 하면서 정말 독하게 준비했습니다. 수능점수도 많이 올렸지만, 수능이 끝난 후에 하루에 11~12시간동안 운동을 하면서 정말 간절하게 준비했어요. 마지막 기회란 생각에 수능이 끝난 실기시즌을 준비할 때 실기를 보기 전날 까지 옷을 한번도 빨지 않았어요. 혹시나 내가 준비해온 그 느낌이 조금이라도 달라질까봐. 혹시 실격을 당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여러 변수를 두고, 일부러 터진 신발을 신고 만점 기록이 나올 때 까지 연습 또 연습을 했습니다.그렇게 해서 국민대학교에 실기 부분에서 300점 만점 중 296점을 받아 최고점수로 입학할 수 있었고, 이렇게 간절하게 열심히 준비해서 온 학교라 정말 자부심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자퇴신청서를 휴학신청서로 돌려받다
학교에 입학한 후 첫 학기에 100명중 40등을 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점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교직이수를 하려면 상위 10%안에 들어야 했기에 저에겐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2학기 까지 다니고, 학교 선생님이 되지 못할 것 같으면 학원이라도 차려서 선생님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학교에 자퇴신청서를 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제가 왜 그랬는지 후회스러워요. 정말 다행스럽게도 자퇴신청서를 받으신 교직원분께서 휴학으로 돌릴 것을 설득해주셨고, 다행히 휴학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휴학한 후 교육쪽 경험을 쌓으려 초등학교~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축구, 농구, 배드민턴, 인라인 스케이트, 태권도등을 가르쳤고, 체대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제가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지도했습니다. 이런 교육 경험들을 통해, 제 꿈에 좀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저를 다시 학교로 이끌었습니다. 학교에 돌아오니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덕분에 첫학기에는 100명중 11등을 그 다음학기 부터는 과탑과 성곡장학생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나를 이끌어준 국민대학교 교수님들
다시 학교로 돌아와 제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교수님들을 찾아 뵙고 제 꿈과 딜레마를 상담했던 일입니다. 거의 열 다섯분 정도를 찾아뵈었던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요즘시대에 임용고시 되기 너무 힘들다고 다른 길을 가라고 말리기도 했지만, 그런 중에서도 제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믿어주는 많은 사람들과, 저에게 힘을 주었던 국민대학교의 교수님들 덕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성현아 너 정말 잘 어울린다. 그 직업이 1%의 사람만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게 너가 될거라는 생각이 든다.” 라고 말씀해 주셨던 이제현 교수님의 말씀과 “성현아 너는 좋은 사람인건 확실하지만, 사람은 좋은 사람인것만으로 남아선 안 된다. 또 다른 무기를 하나 가져라.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너를 필요로 하고, 널 찾는다. 그런 사람이 되거라.”라는 말씀을 해주셨던 조양수 교수님의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런 말씀들 덕에 그때 제가 용기를 가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비전을 갖지 못한 국민*인들에게
지금 당장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면, 일단 관심 있는 분야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일단 관심분야를 정하고 관련된 일을 시작해보세요. 옳지 않은 판단을 한 것 이었더라도, 그 길이 아니라는걸 안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길이 아니라면 또 다른 일을 해보면 되는 거죠. 가만히 앉아 생각만 하지마시고,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일단 시도 해보세요. 혹시 그저 편안한 일, 고연봉의 일을 하고자 내 꿈의 방향성을 그쪽으로 몰고 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결국 나만의 비전을 찾을 수 있을것 입니다. 비전을 찾고 나면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 비전이 원동력이 되어 열심히 더 열심히 살도록 해줄거에요. 우리 학교 학생들이 모두 자신만의 비전을 갖고 국민대학교의 자부심을 가지며 우리사회에 빛을 낼 수 있는 국민*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여덟살 때부터 영화를 만들 정도로 영화에 푹빠져 살았다고 한다. 열일곱의 스티븐 스필버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제작소였던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찾아가 영화를 만드는 유명한 사람에게 자신의 영화를 소개했다. 그 뒤 매일같이 스튜디오를 찾아가 빈방을 자기 방으로 만들어 ‘스티븐 스필버그 23c호실’이라는 명패를 만들어 달았다고 한다. 물론 스티븐 스필버그가 정말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재능을 만든 것은 영화에 대한 그의 비전과 꾸준한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만 시간을 투자하면 못 이룰일이 없다는 말이 있다. 하루 빨리 아직 비전을 찾지 못한 국민*인들이 만시간을 투자할 만큼 간절한 비전을 찾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