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닫기

전체메뉴

Quick Menu

Quick Menu 설정

※ 퀵메뉴 메뉴에 대한 사용자 설정을 위해 쿠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뉴 체크 후 저장을 한 경우 쿠키 저장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FF Magazine] 불멸의 춤꾼, 최승희

  • 작성자 이민아
  • 작성일 10.10.04
  • 조회수 10780


일제 강점, 해방, 전쟁 등 격동의 시대로 점철되었던 우리 근현대사 속을 거닐다보면 그 시대적 환경 탓에 예술가들이 출중한 기량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우리는 심지어 ‘만약 지금 이곳에서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법을 동원해가며 상상해보게 되는데, 최승희가 바로 그런 대표적 사례이지 않을까 싶다. 무용을 계속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친일과 월북을 과연 비켜갈 수는 없었을까? 세계 순회공연 차 1937년 이후 수년 간 구미에 머물 때 그곳에 계속 머물렀더라면. 해방 후 남편 안막의 권유를 뿌리치고 남한에 남았더라면.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종국에는 비극적으로 마감되고 만 최승희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가정은 그녀의 개인사나 예술적 여정이 성공적이었느냐 하는 문제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보다는 순전히 관객의 입장에서 그의 춤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기회가 이곳에서도 주어졌더라면 하는 희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가정법에 기대는 화법은 역사에 대한 아쉬움 혹은 안타까움의 발로이다. 분명한 것은 최승희의 무용은 우리 근대 무용 그 자체라고 할 만큼 부정할 수 없는 역사였다는 점이다. 우리가 최승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단하고 금기시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무용의 진면목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이 열렸을 것이다. 이런 부질없는 가정은 월북 예술가라는 혐의 때문에 근 반세기 동안 최승희를 거론하는 것조차 기피했던 것에 대한 무력한 대응이자 뒤늦은 각성에 대한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최승희는 나라가 일제의 강점으로 식민지가 되던 다음 해인 1911년에 태어났으니, 일제강점기를 경유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순탄한 삶을 살 수 없는 운명이었다. 무용가로서 가장 빛나는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전성기는 최승희에게 더욱 더 암담한 시절이었다. 세계사적인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하는 무용가의 삶이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전반까지 ‘코리안 댄서 최승희’라는 이름으로 일본, 미국, 유럽, 남미, 중국, 소련 등 전 세계를 무대로 공연할 때마다 그녀에게는 열렬한 호응과 최상의 찬사가 쏟아졌다. 일본을 제외한 해외에서만도 15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고 전해진다. 공연은 어느 곳에서나 국립극장 등에 버금가는 수준의 대극장에서 열렸으며 대만원을 이루었다. 그의 열혈 팬들 중에는 피카소, 마티스, 찰리 채플린, 장 콕토, 로맹 롤랑, 그리고 로버트 테일러나 게리 쿠퍼 등이 있었으며 특히 피카소는 그녀의 춤을 그림으로 그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할리우드에서는 영화 출연 제의가 잇따랐다. 또한 중국의 주은래 수상은 한국전쟁 때문에 중국으로 피난한 최승희를 북경의 중앙희극학원 교수로 추대할 만큼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최승희를 둘러싼 기록들은 가히 전설적이라 할 만하다. 그 많은 공연과 무성한 평가가 있었던 것에 비해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는 빈약하기만 하다. 정작 춤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동영상은 남아 있지 않고 그저 사진만이 남아 있으니, 이것만으로 그녀의 춤을 상상해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바로 다음 동작으로 이어질 듯한데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는 모습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하늘을 나는 듯한 자유로운 비상도 정지되어 있고, 무용이 전개되는 맥락도 모두 끊겨 있다. 뉴욕이나 파리 등 세계적인 무대에서의 공연마다 조선 악사들을 늘 대동했다고 하는데, 그들의 악기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사진은 그저 지극히 찰나적인 한 순간을 붙잡아매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상상에 맡겨버린다. 뉴욕에서 미국 근대 무용의 선구자인 마사 그레이엄과 함께 공연을 벌였는가 하면,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다이 상카, 스페인의 아르젠티나 등과 함께 거명될 정도로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랐던 그녀의 실체를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또 다른 전성기라 할 월북 이후의 활동에 대한 자료는 더욱 드문 편이다. 자료의 부재로 인해 불과 몇 십 년밖에 되지 않는 시간의 벽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자신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최승희의 또 다른 비극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는 우회하고 또 상상하는 것으로 자위해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상상력과 통찰력을 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몇몇의 사진들을 통해 뿜어내는 그녀의 카리스마는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아도 확실히 특별한 데가 있어 보인다. 7,80년 전에 펼친 공연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일 뿐더러 시선을 사로잡는 강력한 매력과 자신감,
그리고 자유로움이 있다. 이를테면 1939년 파리 공연 때 선보였다던 <보살춤>의 경우, 반라(半裸)의 차림에 반짝이는 금속성의 액세서리, 섬세한 손놀림, 미묘한 감정이 배어 있는 표정과 눈빛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붙들어 맸을 것이다. 매 작품마다 시선의 느낌이 다른 최승희의 표정은 매번 특별한 분위기를 선사하며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마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보살의 춤이니만큼 큰 동작보다는 매우 절제된 움직임, 작지만 우아한 움직임이 주조를 이루었으리라고 본다. 특히 손의 섬세한 움직임이 관객의 몰입을 증대시켰을 것이다. 반나체인 채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춤을 춘다는 것은 고도의 원숙함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자칫 보는 이의 숨 막히는 듯한 긴장감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말 일이기 때문이다. 보살춤은 최승희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만큼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다고 하니, 이 춤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으로 능히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동양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던 서구인들에게 환상 그 이상의 신비롭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을 것이며, 더불어 최승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실제로 파리에서 <초립동>을 공연하고 난 며칠 후에 파리에는 초립동 모자가 유행했고, 공연 후에는 서양의 무용가들이 너도나도 최승희 조선 무용을 시도해 봤다고 한다.
조선적인 혹은 동양적인 소재를 가지고서도 반나체의 차림으로 춤을 추었다는 것에서 우리는 최승희의 과감함과 현대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근대 무용은 서양의 근대 무용을 모방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며, 몸 자체보다는 의상을 통해 춤의 언어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춤을 배운 최승희는 일본의 근대 무용을 훌쩍 뛰어넘어, 현대 춤의 핵심이랄 수 있는 몸의 해방을 성취했던 것이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에. 최승희는 사회주의 계열 문학가인 오빠 최승일을 따라 1926년 경성공회당에서 일본 근대 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무용이라는 것을 처음 접했다. 최승희가 불과 열여섯의 나이에 이 공연을 보고서 춤꾼의 삶을 살기로 결정했던 것도 바로 근대 무용이 성취한, 몸을 통한 자유로운 표현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최승희의 특별한 카리스마는 어린 나이 때부터 다부지게 다져진 강렬한 열망이 낳은 것이었으리라. <보살춤>만 하더라도 한국, 중국, 일본 등 지역의 특성에 따라 10여 종의 버전을 갖고 다르게 선보였다고 하니 그 주도면밀함과 유연함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근대 무용에서 자유로운 표현과 몸의 해방을 느꼈을 것이라 짐작되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자.
지금까지 필름 형태로 남아 있는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1937년에 만들어진 <미몽>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영화는 여성의 욕망과 외도를 도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식민 치하의 <자유부인>이라 할 만하다. 교수 부인의 외도 문제를 다룬 <자유부인>이 1956년 장안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뜨거운 논란거리였다면, <미몽>은 20년이나 이른 시기에 가정 윤리의 측면에서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종결 방식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자유부인>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영화였다(영화의 엔딩 신에서 살의를 지닌 남편은 권총을 들고 병원에 쳐들어오지만 그녀는 이미 그 전에 스스로 자살해버렸다. 남편의 망연자실한 그 표정이란!).
그런데 <미몽>에서 유독 눈에 띄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근대 무용 공연 장면이 제법 긴 호흡으로 상연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 최고의 배우인 문예봉은 <미몽>에서 앙칼진 목소리와 히스테리컬한 태도로 바람난 주인공 캐릭터를 더할 나위 없이 잘 구현하고 있다. 문예봉은 정부(情夫)와의 외도 및 백화점에서의 자유로운 소비 욕구에 눈이 먼 나머지 어린 딸의 애절한 호소마저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집을 나가 호텔에서 정부와 함께 지낸다. 그리고 소일거리로 무용 공연을 보러 갔는데, 이 모던 댄스에 혹해서 무용단의 일원이 되겠다고 매일같이 조택연의 분장실을 찾아간다. 간신히 허락을 구한 주인공은 다시 정부마저 과감하게 내치고 지방순회공연을 떠나는 무용단을 따라나서다 파국을 맞는다. 물론 주인공의 선택이 운명적인 것이었는지 변덕이었는지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조택연은 최승희보다 늦게 무용을 시작하였고, 또 최승희만큼의 유명세를 얻지 못했을지라도 배구자, 최승희와 더불어 이 땅의 근대 무용을 개척한 3인방 중의 한 사람이었다. 영화에서 조택연의 무용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난삽하게 전위적인 것이었다. 꽤나 전위적인 춤사위가 1930년대 초창기의 대중적인 영화에 등장하는 것도 의아할 뿐더러, 가정을 갖고 있는 부인이 전위적인 모던 댄스를 보고 무용단의 일원이 되겠다고 하는 설정 역시도 개연성 내지 현실감이라는 측면에서 생경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근대인에게서 무용이 갖는 의미를 한번 생각해본다면 수긍 못할 일도 아니다. 특히 당시의 조선처럼 완고한 가부장제의 질서가 근간을 이루는 사회에서 몸의 해방은 여성의 해방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근 2000년 동안 서양철학의 뼈대를 이루어온 이분법적인 틀 속에서 육체와 정신의 대립구도는 여성 대 남성의 대립구도와 한 쌍을 이루지 않았던가.
 
또한 무용을 영화에 담는 일 역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최승희도 미국과 북한에서 촬영한 것까지 치자면
네 편의 영화를 찍었으니, 오히려 무용은 근대의 공간에서 특별한 문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근대의 가장 각광받는 예술로 부상하고 있는 무용을 영화가 주목했던 것이다.
이미 1910년대에는 세기의 흥행사인 디아길레프가 등장하여 발레와 근대 무용의 전성기를 마련했었다. 근대인들에게 무용은 근대 특유의 열망을 담고 있는 예술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승희는 그러한 문화적 자장 속에서 무용을 자신의 삶으로 택한 것이었다.
 
예술이든 사회주의든 모두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러한 점에서 세기적 무용가인 최승희와 사회주의 혁명가인 남편 안막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다.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이 되어 무용을 연마한 지 3년 만에 귀국하여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운영한다. 이때 경제적인 운영난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녀는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 출중한 미인이기도 한 최승희에게 재력을 앞세운 숱한 남성들이 접근하였으나 그녀는 와세다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는 가난한 대학생인 안막을 반려자로 택한다. 지적으로 상당히 총명했던 것으로 알려진 최승희는 결혼 상대가 자신의 예술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사상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초 조선에는 만주 침략을 위한 일제의 병참기지화가 본격적으로 개시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공황의 여파가 식민지 조선에서 더욱 매섭게 불어 닥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결혼과 성은 자본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있었다. 연구소 운영난에 허덕이면서도 그러한 세태에 편승하지 않는 최승희의 주체적인 의식과 도도한 태도는 그녀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만드는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안막은 최승희를 위해 혁명가의 길을 접고 그녀의 매니저 역할을 맡는다. 혁명가는 많았지만 세계에 조선을 알릴 만 한 예술가는 드물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그의 판단은 옳았다. 최승희가 세계적인 예술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전략을 짜내고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 안막의 몫이었다. 식민지 하에서 일제의 엄혹한 감시를 피해가면서 조선무용을 주창한 최승희에게는 안막 같은 지적인 사회주의 혁명가만 한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정세 판단과 전략을 고안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37년에 미국에서 공연을 가질 때 재미교포들이 최승희를 친일무용가로 오해를 하고 최승희 배격 운동까지 벌였는데, 재차 미국을 방문한 1939년에는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열렬한 환영을 받을 수 있도록 작업을 벌인 것도 안막이었다. 무엇보다도 최승희가 안막으로부터 받은 사상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최승희는 시종일관 조선무용을 주창할 뿐만 아니라 조선무용을 민중적인 차원으로 이끄는 데 있어서도 같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일원이었던 오빠 최승일뿐만 아니라 안막에게서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리라. 결혼 이후 최승희의 창작무용에서 식민지 지배의 고통에 시달리는 민중을 다룬 내용들이 많아진 것이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저항적이고 민중적인 내용을 담은 무용을 지방순회 공연에서 적극 선보인 것도 안막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는 행보였다.

최승희는 2차 대전 말기에 일제의 사기 진작을 위한 만주에서의 위문 공연에 투입되어 춤을 추어야 했다. 이 친일 행적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감을 크게 느꼈던 최승희는 처음엔 서울에 남고자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결국 남편 안막의 권유를 받아들여 1946년 월북을 감행한다. 월북한 이후 최승희 무용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김일성의 전폭적인 지원이나 중국 왕래를 통해 새로운 동양 무용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 그것이다. 오늘날까지 북한은 물론 중국의 무용에 끼친 최승희의 영향은 지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평가를 떠나서 보자면 최승희는 월북 이후에 또 다른 전성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남편 안막과 함께 하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1958년 안막이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대상이 되면서 최승희의 무용 인생도 거의 종말로 치닫게 된다. 최승희는 평생에 걸쳐 모두 310편이 넘는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공연 기록은 2천5백 회 이상이었다고 한다.
글 / 김수기(현실문화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