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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마음을 비워 사물을 보는 것이 ‘공’ / 김영수 일본학연구소 책임연구원

  • 작성자 조영문
  • 작성일 07.02.08
  • 조회수 7109

보스턴 레드삭스의 슬러거 라미레스는 상대 투수의 구질을 전혀 분석하지 않는다. 이른바 무심타법(無心打法)으로, 물 흐르는 듯한 타격으로 유명하다.

19세기말 일본에 온 한 서양인이 활쏘기를 배웠다. 일본인 스승은 아무 기술도 가르치지 않고, 다만 마음을 버리라고 말했다. 이 서양인은 당황했다.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건도 아니고, 어떻게 마음을 버릴 수 있는가? 그러나 마침내 마음을 버리게 된 그는 스승에게 “마음은 다 버렸습니다. 다음은?”이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승은 “다 버렸다는 그 마음을 버려라.”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불교적이다. 진정한 기술은 기술을 완전히 잊을 때만 가능하다. 이것이 불교가 생각하는 참다운 길이다. ‘장자’에 나오는 <포정해우>도 비슷한 예화이다. 전국시대 위나라의 요리사 포정이 문혜군(文惠君)을 위해 소를 잡았다. 그가 손을 놀리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밟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휙휙 뼈 발라내는 소리와 칼로 가르는 소리가 모두 절도에 맞았다. 감탄한 문혜군은 “참으로 훌륭하구나. 소 잡는 기술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포정은 “저는 도(道)를 좋아합니다. 기(技)보다 앞섭니다.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보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고 했다.

도교의 무위(無爲)는 불교의 무심과 닮았다. 그래서 불교가 처음 중국에 유입되었을 때, 중국인들은 도교의 눈으로 불교를 보았다.(格義佛敎) 공자의 가르침은 세상을 어떻게든 좋게 만들려는 ‘유위(有爲)’이다. 유불도, 이 세 사유방식이 2천여 년 간 동아시아 사상계의 주도권을 놓고 각축했다. 우리도 고려 때까지 1000년 정도는 불교를, 다음 500년은 유교를 존신했다.

무심이 어떻게 가능한가? 놓아서 비우면 된다. 불교 사상의 진수는 공(空)이다. 이로부터 ‘0’(zero)이라는 개념도 탄생했다. 인도인의 이 기호가 없었다면 인류의 숫자생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을 것이다. 매 단위마다 새로운 기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은 말로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고 하고, “가르침 밖에 다른 가르침이 있다.”(敎外別傳)고도 하며, “바로 마음을 가리킨다.”(直指人心)고 한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문자로 공사상을 표현한 불교경전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이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약칭이며, ‘반야’는 판냐(pan·n·ya)의 음차로 참된 지혜, ‘바라밀다‘는 파라미타(paramita)의 음차로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즉, “참된 지혜로 구원에 이르는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서유기’의 주인공이자 위대한 불경 번역가였던 현장법사의 한역본은 겨우 260자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는 대단히 철학적이어서 팔만대장경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진리는 이 260자를 넘어서지 않는다고 한다.

플라톤은 이성(logos)을 진리(Idea)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생각했다. 서양문명은 기본적으로 이 전제 위에 서있다. 공 사상은 그 길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성의 산물은 개념이다. 개념은 서로 대비되는 두 쌍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전형적인 틀이다. 예컨대 이 세계는 객관과 주관, 또는 사물과 주체로 나누어진다. 반야심경은 이런 대비적인 개념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부정하고, 다시 그 부정조차 부정한다. 말로 진리를 얘기하면서, 그 말 역시 부정하는 것이다. 우주는 텅 빈 것일 뿐, 비었다는 것조차 비어있다. 불교의 화두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며 무맥락적이다. 그래서 감성, 이성 또는 오성으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당황케 한다.

‘반야심경’은 인간이 쌓아 온 모든 것, 심지어는 인간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몸과 의식조차 단지 환영(maya)이라고 본다. 그것을 실재라고 보는 뒤집힌 인식이 인류와 인간을 고통의 바다에서 방황케 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급진적이다.

그러나 넘쳐나는 풍요 속에서도 여전히 불행한 현대의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원본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2/07/20070207009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