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 고등법원은 지난 5월30일 일제에 강제 연행된 한국인 희생자 15명이 낸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소송 항소심에서 “당시의 법질서(메이지 헌법) 아래에서 정부는 국적에 관계없이 피해자의 민법상 불법행위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안전수송 의무를 저버렸다는 이유로 2001년 8월 교토지방법원이 일본 정부는 1인당 300만엔씩 4500만엔을 희생자들에게 지급하라는 원심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
1991년 제기된 이 소송은 일본 정부의 전후보상 책임을 묻는 것으로는 거의 유일하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45년 8월24일 일본 해군 소속 우키시마호를 타고 한국으로 귀환하던 도중 배가 폭발해 550여명이 숨진 비극이다.
오사카 고등법원의 판결은 전반적인 전후보상 문제에 접근하는 일본 정부의 기본시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고등법원은 메이지헌법에 따라 국적에 관계없이 일본 정부의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전쟁에서 사망하거나 다친 일본인에 대해선 1952년 4월30일 제정(시행은 4월1일)한 유족보호법에 따라 보상을 했어요. 식민지 강제연행자에 대한 전후보상은 일본 정부의 주장처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의 외교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강제동원한 ‘식민지 일본인’들을 패전 이후 ‘비일본인’이라고 발뺌하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성, 곧 ‘원국민에 대한 일본의 국가책임’ 문제입니다.”
89년 결성돼 이 소송을 지원하고 있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촉진하는 모임’(촉진모임)의 사무국장인 아오야기 야즈코(56)의 설명이다. 52년 7년간의 미군정 통치에서 독립함과 동시에 일본 정부는 ‘식민지 강제연행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파렴치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게 바로 유족보호법이다. 이 법의 국적조항은 ‘식민지 등에 호적이 있으면 보상하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이 법은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 한국 독립을 약속한 43년 11월 카이로 선언을 이행하겠다고 다짐한 일본이 원국민에 대한 책임을 저버린 것이지요. 국제적인 상식을 무시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아오야기는 한국전쟁을 꼽는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옵서버(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해 국적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었어요. 그걸 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가 막았고, 일본을 한국전쟁의 후방기지로 활용하는 게 시급했던 미국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한국의 불참 속에 강화조약이 51년 9월8일 체결됐고, 52년 4월28일 발효했어요. 미국이 알선한 한-일 예비회담이 51년 10월 처음 열렸고, 문제의 유족보호법이 강화조약 발효 이틀 뒤 제정됐지요.”
그는 처음부터 일본이 식민지 강제연행자에 대한 전후보상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45년 9월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희생자 명단이 작성됐는데, 이 명단에는 민간회사에 일했던 강제 연행자들도 모두 군속으로 분류돼 있어요. 정식 군속도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꼈다는 것이지요.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이런 보상책임을 저버렸어요.”
촉진모임에서 통역을 맡고 있는 이와하시 하루미(58) 역시 학생운동을 하다가 89년 송두회 할아버지를 알면서 이 모임에 뛰어들었다. 송 할아버지는 ‘원국민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내세우며 69년 일본 국적 확인 소송을 내는 등 40여년 동안 전후보상 활동을 하다 지난해 6월8일 한많은 눈을 감았다.
이순을 바라보는 두 중년 일본인 여성은 지난 1일 한국을 방문해 4일 국회 김성호 의원(민주), 5일 전주의 우키시마호 유족, 6일 국민대 한국근현대사연구팀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등을 방문하고 8일 출국했다. 두 사람은 한-일 협정을 맺은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만나고 싶어한다. 항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련 자료를 주고 당신이 할 일이 아직 많다’고 권유하기 위해서다.
“강제연행자 전후보상은 ‘원국민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 문제입니다. 그게 잊혀져 가는 것 같아 방문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