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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두 개의 수영장 이야기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작성자 박윤진
  • 작성일 21.01.18
  • 조회수 325

스포츠라는 단어는 대부분 역동적인 움직임과 다이내믹한 어떤 장면을 연상케 한다. 활발한 몸의 움직임과 그에 따라오는 
스트레스 해소도 역시 미덕이다. 하지만 스포츠를 주제로 한 그림들은 그와 같은 역동성이나 활발함을 넘어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수영장 그림과 사진을 통해, 우리의 일상성을 벗어난 스포츠 공간, 스포츠의 몸이 어떤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을 살펴보자. 

 

표백된 공간과 신체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의 고향은 물이었다. 태아는 모태의 양수 속에서 호흡하며 작은 배아에서 장기간 성장하여 공기 속으로 탄생한다. 그렇기에 우리 일상에서 가장 푸근한 휴식을 하기 위한 첫째 조건은 아마 물속으로 몸이 잠기는 그 시간들일 것이다. 마치 원초의 고향을 찾아가듯이. 이런 물이 스포츠 공간으로 쓰이는 곳이 수영장이다. 스포츠에서 수영장은 초를 다투는 격한 접영을 필두로 아티스틱 스위밍의 아름다운 율동이 전개되는 공간으로만 인식될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 스바르보바(Maria Svarbova)의 수영장 사진은 수영이 지니는 즐거움의 영역보다는 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여러 음영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마리아 스바르보바는 슬로바키아 화가로 2014년에 스위밍 풀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녀는 현재 슬로바키아에서 1930년대에 지어진 수영장 13개를 찾아다니면서 그곳을 자신의 감성으로 해석하여 재현하고, 인물을 배치하여 작업을 완성한다. 그녀의 사진 속에는 움직임이 없다. 물도 움직이지 않으며, 사람도 움직이지 않는다. 모델들은 동일한 유니폼을 입고 있으며, 조각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으나, 복제된 인형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적인 수영장의 모습. 이는 생명이 결여된 장소성, 표백된 신체를 지시한다. 하지만 파스텔 색채의 아름다운 배합과 햇살의 농도, 모델들이 보여주는 창백한 아름다움이 결합되면서 조용한 그녀의 사진들은 부인할 수 없는 망막적 아름다움을 남긴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그녀가 제시하고자 한 스파르타키아다(Spartakiada)의 한 측면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스파르타키아다는 구 소련이 서구의 올림픽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올림픽으로 첫 대회는 192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올림픽을 고대 올림픽의 귀족적 성격을 계승한 ‘자본주의적 축제’로 규정지으며 스파르타키아다가 창설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알바니아도 이를 본 따서 만들었다.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사진 작품은 당시 5년마다 개최되던 체코 공산 정부하에서의 그녀의 기억을 기반으로 제작되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 속에는 혹독한 훈련과 강박적인 몸동작에 대한 미묘한 뉘앙스가 배어있는 듯하다. 집단주의 체제하 훈련 결과의 감성을 드러내는 듯, 정지된 그들의 신체가 무심한 햇살, 깨끗하고 조용한 물 표면, 파스텔 색조의 과거 수영장 등의 모습들과 대조되면서 독특한 감성을 자아낸다. 이 느낌은 신체의 격동성이나 움직임이 당연히 예상되는 공간에서 그것이 주는 기쁨이 사라졌을 때의 건조하고도 정지된, 무감각의 느낌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마리아 스바르보바, (2017) 마리아 스바르보바, (2017)

 

 

데이비드 호크니, <예술가의 초상>(1972)

 

 

데이비드 호크니, <더 큰 첨벙>(1974)

 

내밀한 욕망의 신체와 그 표상
이것과 대조되는 또 하나의 수영장 그림이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 1974)을 보자. 
이곳 역시 수영장이다. 하지만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공공 수영장과는 대비되는 사적 공간이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수영장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남긴 ‘첨벙’ 하는 물살만이 보인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영국 출신 작가로서 젊은 나이에 게이들의 생활이 자유로운 미국으로 옮겨가 팝 아트 느낌이 나는 색감과 기법으로 일상적인 미국의 삶을 표현한 작가이다. 그가 그린 수영장 그림에서 등장하는 모델은 대부분 남자들인데, 이유는 게이였던 그가 남성의 육체를 가장 손쉽게 감상하고 모델로 쓸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칙칙한 영국에서 캘리포니아로 건너온 그에게 밝은 햇살이 비치는 개인 주택의 수영장은 새로운 회화의 대상이었고, 자신의 욕망과 사물에 대한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고 한다. 그가 그린 수영장 그림에서는 촉각, 청각, 시각의 삼중주가 분출된다. <더 큰 첨벙>에서의 흰 물살, 제목에서 드러나는 청각 효과, 그리고 그 수영하는 인물이 즐기는 물의 감각성은 어쩌면 수영하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기쁨과 감각의 표상일 것이다. 그의 수영장 그림에서는 수영하는 인물의 동작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물살의 일렁이는 모습을 최대한 살린 것이 많은데 이러한 물이 지닌 친연성이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이자. 모두에서 다가오는 보편적인 감각의 즐거움인 것이다. 이 두 작가가 그린 수영장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원초적 공간인 물, 그리고 그 속의 두 가지 대조적인 인간 신체의 반응을 보는 것 같다.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그림이 집단과 전체의 강제 속에서 완벽한 테크닉을 구사해야 했던 신체가 느끼는 고통 혹은 비애를 그린 것이라면,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은 본능이 요구하는 욕망에 충실하며 그것을 커밍아웃하는 신체의 유희를 대변한다. 장기화되는 팬데믹으로 1년이 다 되도록 수영장 출입은 거의 금지되어 있다. 이런 ‘집콕’의 시대에 이 두 예술가가 보여준 수영장의 모습을 보면서, 스포츠하는 신체의 여러 모습을 잠시 생각해 보며, 물이 주는 자유를 그리워한다. 

 

 

글을 쓴 조현신은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
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
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화에 관심이 많다. 2018년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
화사』를 출간했다.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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